성당부근 / 정 린/ 1996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성당부근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만 성경 구절을
성에 낀 창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봇대가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 퍼지면
저녁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도 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오 성가의 앉은 음계를 밟고
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감상]
크리스마스이브에 읽을 만한 시를 생각하다가 이 시를 다시 읽습니다. 한 행 한 행 글자에서 빛이 새어나오듯 새벽 성당부근 풍경이 잔잔하게 다가옵니다. 그런 따뜻한 색감에 마음은 새벽미사 사람들을 따라 나서게 되고요. 이 시에서 보이는 서정의 힘은 각 소재들에게 생명을 준, 애잔한 의인화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따뜻한 성탄절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