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저녁」/ 김다비/ 《문학사상》2004년 12월호
그 저녁
자귀나무 연자꽃 붉어가는 정육점
저녁마다 그 앞을 지난다
갈고리에 걸린 시뻘건 갈비를 보면
오래 전 사내를 품었던 그때처럼
나도 모르게 내 옆구리를 더듬게 된다
그러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몸속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갈비뼈가
나를 슬프게 한다
잊혀진 것들을 부르게 한다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는 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
사람이 떠나도
도무지 인가 주위를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저 몸서리쳐지는 연자꽃 향기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고 싶은 저녁
선연한 달빛이 터럭을 날리며
정육점 안으로 들어선다
옛 사랑이 숨어 있기 싫어하는, 그 저녁
* 시작메모 : 단 한 번도 목숨을 걸고 시를 써본 적은 없다. 시 자체가 목숨이었고, 내가 끌고 가는 목숨이 곧 시였으므로. 그래서일까. 늘 고독하고 추웠던 내 영혼이, 육체가 자귀나무 연자꽃 붉은 길가에서 간혹 잊혀진 것들을 애타게 부르곤 한다. 덧없는 일인 줄 뻔히 알면서.
[감상]
회상도 어떤 매개에 의해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자귀나무와 정육점은 연관성이 없으면서도 이 시의 시적정황에 맞춰 절묘한 표현을 이룹니다. 낮 동안 활짝 펼쳐 있다가 저녁이면 접히는 자귀나무 잎과 꽃향기. 그리고 육체의 날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육점 풍경. 어쩌면 이별이란 저녁 무렵 쓸쓸한 풍경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빠져 드는가 봅니다.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는 말,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