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그 저녁 - 김다비

2004.11.29 16:26

윤성택 조회 수:1533 추천:217

「그 저녁」/ 김다비/ 《문학사상》2004년 12월호

        
        그 저녁

        자귀나무 연자꽃 붉어가는 정육점
        저녁마다 그 앞을 지난다
        갈고리에 걸린 시뻘건 갈비를 보면
        오래 전 사내를 품었던 그때처럼
        나도 모르게 내 옆구리를 더듬게 된다
        그러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몸속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갈비뼈가
        나를 슬프게 한다
        잊혀진 것들을 부르게 한다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는 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
        사람이 떠나도
        도무지 인가 주위를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저 몸서리쳐지는 연자꽃 향기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고 싶은 저녁
        선연한 달빛이 터럭을 날리며
        정육점 안으로 들어선다
        옛 사랑이 숨어 있기 싫어하는, 그 저녁



* 시작메모 : 단 한 번도 목숨을 걸고 시를 써본 적은 없다. 시 자체가 목숨이었고, 내가 끌고 가는 목숨이 곧 시였으므로. 그래서일까. 늘 고독하고 추웠던 내 영혼이, 육체가 자귀나무 연자꽃 붉은 길가에서 간혹 잊혀진 것들을 애타게 부르곤 한다. 덧없는 일인 줄 뻔히 알면서.

        

[감상]
회상도 어떤 매개에 의해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자귀나무와 정육점은 연관성이 없으면서도 이 시의 시적정황에 맞춰 절묘한 표현을 이룹니다. 낮 동안 활짝 펼쳐 있다가 저녁이면 접히는 자귀나무 잎과 꽃향기. 그리고 육체의 날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육점 풍경. 어쩌면 이별이란 저녁 무렵 쓸쓸한 풍경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빠져 드는가 봅니다.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는 말,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711 2005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8] 2005.01.03 2326 229
710 궤도를 이탈한 겨울, 밤 - 유문호 [1] 2004.12.29 1362 206
709 너무 작은 처녀들 - 황병승 [1] 2004.12.27 1380 210
708 성당부근 - 정 린 2004.12.24 1205 190
707 고려장 2 - 정병근 2004.12.23 1133 197
706 언젠가는 - 조은 2004.12.22 1717 194
705 가구의 꿈 - 조덕자 [1] 2004.12.21 1225 204
704 쓸쓸한 중심 - 이화은 [2] 2004.12.16 1588 179
703 여인숙에서 보낸 한철 - 김경주 [8] 2004.12.13 1515 185
702 그 이발소, 그 풍경 - 고경숙 2004.12.10 1308 215
701 불 꺼진 지하도 - 강신애 2004.12.08 1189 191
700 막돌, 허튼 층 - 이운룡 2004.12.07 1081 202
699 오조준 - 이정화 [1] 2004.12.06 1093 203
698 콩나물국, 끓이기 - 이동호 2004.12.03 1420 202
697 거친 나무상자 - 안주철 [1] 2004.12.01 1210 177
696 voyant - 김춘수 [1] 2004.11.30 1229 192
» 그 저녁 - 김다비 [1] 2004.11.29 1533 217
694 흔적 1 - 황상순 [7] 2004.11.27 1575 207
693 울릉도 - 도혜숙 [1] 2004.11.25 1298 177
692 누가 우는가 - 나희덕 [1] 2004.11.23 1638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