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를 이탈한 겨울, 밤 / 유문호/ 《생각과느낌》2004년 겨울호
궤도를 이탈한 겨울, 밤
눈이 내린다, 물끄러미
눈 내리는 걸 보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나는 마음껏 떠나왔다
떠나온 거리만큼 집은,
밤과 낮의 간극 사이에서 일회용처럼 버려졌다
나를 버렸다는, 그래서
길이란 길은 모조리 폭설속에 묻혀버렸다는
혐의 따위는 반성하고 싶지 않다
겨울이었으므로 불온한 일기는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올라간 눈발 같은 혹은
꿈 같은 것이었으니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책임과 의무 사이에서
짓눌러오던 고독을 버렸으니
두통은 깨끗이 물러갈 것이다 그리고
덜어낸 만큼의 눈이 녹을 것이다
나를 가두고 있던 집으로부터 떠나왔다는
해방의 포만감으로
길은 점점 가벼워질 것이다, 창 밖
휘어 꺾여진 밤사이로
우루루 몰려가는 불빛, 이제 그 꿈
어디론가 나는 걸어간다
그럼 아내 같은 집이여,
안녕!
[감상]
내가 누구인지를 캐내다보면 칡넝쿨처럼 수많은 관계가 얽혀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립은 이처럼 팽팽한 관계에 얽혀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드러나는 ‘떠남’은 관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죽고 나서 드는 첫 번째 생각이 ‘부질없다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사에 얽매였던 것들이 모두 방금 지나쳤던 비포장도로의 덜컹거림 같다는 것, 육체는 이제 신작로 초입에서 갈아탈 버스여서 뒷좌석에서 ‘안녕!’하면 될뿐, 길은 불빛을 세우며 끝없이 뻗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시를 만나는 것도 이 시처럼 코드가 맞아야합니다. 그 후련한 상상력이 플러그가 되어 마음의 콘센트에 꼭 맞는 순간 환한 불이 들어오는 이치입니다.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쓸쓸한 그 언저리에 서정이라는 전류가 지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