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있는 두 겹의 방》/ 강신애/ 창작과비평사 시인선
불 꺼진 지하도
지하도에 들어섰을 때 벽에
기둥 그림자가 신전의 열주처럼 드리웠다
왼편 계단에 부려진 빛과 소음,
어두운 반대쪽에서는
목도리를 침묵의 자물통처럼
입까지 채운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도시 한 구석에
이런 간지러운 어둠이 있다니
저녁에, 가끔은 불이 나가야 한다 그때
보이지 않던 사물이 보인다
우주 전파 탐색용 위성 안테나를 설치한
영화 포스터가 번쩍이고
석실(石室)에 갇힌 유령들이 시멘트 기둥 사이를 떠다닌다
전파를 보내다오,
나는 그들의 복화술을 한 가지 말로 번역한다
지하도에 웅크리고 있던 상인들이 일어선다
언제 불이 들어오는 거지? 두런대며
꿈틀거리는 계단, 얼굴 전면(全面)으로
축축한 낙엽이 달라붙는다
속삭이는 소리, 알아들을 수 없다
[감상]
갑자기 전기가 나간 지하도 풍경을 간결한 필치로 소묘한 시입니다. 항상 켜져 있어야할 지하도가 어둑해졌을 때 드러나는 생경스런 풍경은 ‘복화술’처럼 도시의 또 다른 목소리일 것입니다. 영화 ‘콘택트’가 그러하듯, 작금의 과학은 외로운 인간의 부단한 정체성 찾기가 아닌지요. 속삭이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통의 단절, 불 꺼진 지하도는 어쩌면 우리 내면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