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의 검법> / 강수/ 《시향》2004년 겨울호(지난 계절의 시 다시보기 中)
잔디의 검법(劍法)
아스팔트 틈에 자리잡은 잔디 줄기 하나
길가에서부터 길 안쪽으로 칼자국을 내고 있다
아무도 몰래
아스팔트를 잘라 나가는
저 여린 칼날의 끈질긴 힘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초고수의 검법(劍法)
나도 그 검법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다
베인 것을 한참 지난 뒤에야 알았다
이른 새벽,
푸른 칼날에 묻어 있는 이슬방울들을 보았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별빛들이
칼날을 투명하게 벼리고 있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땅 속에서 땅 위에서
잔디 이파리 속에서
내 몸 속에서
달팽이 걸음처럼 일어나고 있는 쿠데타
저 잔디……
아스팔트 보수반 사람들이 몇 번을 잘라내도
멀찍이 물러섰다가 다시 꼬물꼬물 기어 나와
아스팔트 속으로 파고드는,
칼의 영혼.
아무 것도 자르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르고 있다
[감상]
잔디가 검법을 구사하는 무사(武士)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는 아스팔트 속을 파고드는 ‘칼’을 든 초고수로 경외감을 갖게 합니다. 시적 주체를 의인화함으로서 타자의 위치가 치환되고, 그 존재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는 힘이 있다고 할까요. 여하간 삶에서 시심((詩心)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세상 생명에 대한 의인화를 잊어버릴 때입니다. 눈동자가 까맣고 맑은 어린아이와 같은 눈, 그리고 그런 호기심. 이렇듯 좋은 시는 마음 속 주파수찾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