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잔디의 검법 - 강수

2005.01.26 15:43

윤성택 조회 수:1140 추천:219

<잔디의 검법> / 강수/ 《시향》2004년 겨울호(지난 계절의 시 다시보기 中)


        잔디의 검법(劍法)

        아스팔트 틈에 자리잡은 잔디 줄기 하나
        길가에서부터 길 안쪽으로 칼자국을 내고 있다
        아무도 몰래
        아스팔트를 잘라 나가는
        저 여린 칼날의 끈질긴 힘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초고수의 검법(劍法)
        나도 그 검법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다
        베인 것을 한참 지난 뒤에야 알았다
        이른 새벽,
        푸른 칼날에 묻어 있는 이슬방울들을 보았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별빛들이
        칼날을 투명하게 벼리고 있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땅 속에서 땅 위에서
        잔디 이파리 속에서
        내 몸 속에서
        달팽이 걸음처럼 일어나고 있는 쿠데타
        저 잔디……
        아스팔트 보수반 사람들이 몇 번을 잘라내도
        멀찍이 물러섰다가 다시 꼬물꼬물 기어 나와
        아스팔트 속으로 파고드는,
        칼의 영혼.
        아무 것도 자르지 못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르고 있다

[감상]
잔디가 검법을 구사하는 무사(武士)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이 시에서는 아스팔트 속을 파고드는 ‘칼’을 든 초고수로 경외감을 갖게 합니다. 시적 주체를 의인화함으로서 타자의 위치가 치환되고, 그 존재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는 힘이 있다고 할까요. 여하간 삶에서 시심((詩心)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세상 생명에 대한 의인화를 잊어버릴 때입니다. 눈동자가 까맣고 맑은 어린아이와 같은 눈, 그리고 그런 호기심. 이렇듯 좋은 시는 마음 속 주파수찾기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731 왕오천축국전 - 차주일 2005.03.03 1224 191
730 활엽 카메라 - 김정미 [1] 2005.02.28 1287 217
729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746 191
728 오토바이 - 이원 2005.02.24 1270 181
727 상계동 비둘기 - 김기택 2005.02.23 1162 163
726 침몰 - 서동인 [1] 2005.02.16 1316 189
725 물방울 송곳 -안효희 2005.02.14 1280 183
724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2005.02.04 1283 168
723 겨울판화 - 정주연 2005.02.03 1338 192
722 블루스를 추고 싶다 - 함태숙 2005.02.01 1189 196
721 포레스트검프 - 문석암 [3] 2005.01.27 1356 220
» 잔디의 검법 - 강수 [1] 2005.01.26 1140 219
719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44 178
718 리필 - 이상국 [2] 2005.01.21 1484 192
717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 신지혜 [1] 2005.01.20 1422 229
716 소나무 - 마경덕 [1] 2005.01.19 1889 201
715 네 사소한 이름을 부르고 싶다 - 박소원 [1] 2005.01.18 1680 215
714 목내이 - 김자흔 2005.01.13 1215 168
713 내출혈 - 허금주 [3] 2005.01.10 1286 183
712 나의 처음 - 윤의섭 2005.01.04 1576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