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소주를 마신다> / 이은채/ 《시와시학사》
위험한 그림
그때 느닷없이 해안의 한끝이 기울기 시작했네 기슭을 떠돌던 바람이 달려와
철 이른 동백숲 벼랑을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사라져버렸지 나는 사뭇 근심스러
워져 욱신욱신 몸살 앓는 벼랑 근처를 서성였다네
평일 낮 두시의 벤치가 늙은이마냥 다리를 벌리고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더
군 자꾸 막막해져서 더듬더듬 소주를 마셨네
꽃이야 피든 말든 나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해안의 한끝이 마저 기울자 이른 동백숲 피멍든 벼랑 아래 붉게 물든 그림자
하나 절룩이며 돌아섰네
해조음, 뻘밭마저 허전했던 그해 봄은 아무래도 내겐 영 위험한 그림이었네
[감상]
'나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지', 이 절박한 말이 눈부신 동백숲 안에 있다는 게 마음을 아리게 하는군요. 누구에게나 위험한 그림이 있을 것입니다. 추억 속에서 영영 잊혀지지 않는 풍경, 위험할수록 더더욱 아름다웠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