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 조정/ 《시향》2004년 겨울호 (지난 계절의 시 다시보기 中)
선풍기
T자로(字路) 끝
좌회전 혹은 우회전 뿐인 길에 빨간 불이 켜진다
브레이크르 누르는 우익에 침이 고인다
죽은 산을 지고 사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나는 시종 왼쪽이 무거웠다
수리비가 더 나가게 생긴 선풍기를 수리해야겠다
사공이 물 위에 누워 별을 더듬는다
불안한 점괘였다
누가 우주를 슬쩍 흔들어 제 자리에 놓는 소리가 들렸다
해일이 일었다
풀뿌리가 힘을 다해 땅을 움켜쥐고 있던 날이었다
새들은 마음과 눈과 귀가 부서져
저런, 피 묻은 구름이 두 손을 적시었다
선잠에 악몽이었다
등이 끈끈한 선풍기가 꿈의 모가지를 잡고 찌그덕거린다
아버지 불길한 저 산을 팽개치세요
보리 싹이 꿩 발목까지 자란 이월 스무날 밤마다 돌아와
제 몫의 젯밥을 먹고
왼쪽으로 왼쪽으로 어둠에 밀려 행군해 가던
그들이 좌회전 화살표를 장전했다
내 이마를 조준했다
산이 버티고 선 정면을 향해 나는 돌진해 버렸다
방바닥을 구르며 쿨럭거리는 선풍기를 두고 밤 근무 나간다
[감상]
고장난 선풍기와 아버지의 삶을 대비시킨 비유가 강렬합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오른쪽이 마비된 풍으로 고생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산이셨던 아버지는, 죽은 반쪽을 지고 사셨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그런 아버지의 수발을 들었던 화자의 내면과 불길한 꿈의 형상이 인상적입니다. 또 그것을 통한 선풍기의 직관도 새롭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