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2003년《작가세계》로 등단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 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도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의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감상]
이 시를 읽다보면 담요 속에 있는 것 마냥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내면의 진실한 세계가 언어와 맞닿아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닌다고 할까요. 곳곳의 표현에서 오는 즐거움은 사물에 대한 상상력이겠고, 잔잔한 서정은 따뜻한 온기를 나눠줍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말해주듯 작고 소박한 현실이 아내에게는 꿈과 희망의 장소라는 것이 내내 가슴에 남습니다. 영혼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