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2005.02.04 12:40

윤성택 조회 수:1248 추천:168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2003년《작가세계》로 등단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 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도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의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감상]
이 시를 읽다보면 담요 속에 있는 것 마냥 마음이 포근해집니다. 내면의 진실한 세계가 언어와 맞닿아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닌다고 할까요. 곳곳의 표현에서 오는 즐거움은 사물에 대한 상상력이겠고, 잔잔한 서정은 따뜻한 온기를 나눠줍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말해주듯 작고 소박한 현실이 아내에게는 꿈과 희망의 장소라는 것이 내내 가슴에 남습니다. 영혼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시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731 왕오천축국전 - 차주일 2005.03.03 1198 191
730 활엽 카메라 - 김정미 [1] 2005.02.28 1259 217
729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698 191
728 오토바이 - 이원 2005.02.24 1231 181
727 상계동 비둘기 - 김기택 2005.02.23 1126 163
726 침몰 - 서동인 [1] 2005.02.16 1293 189
725 물방울 송곳 -안효희 2005.02.14 1257 183
»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2005.02.04 1248 168
723 겨울판화 - 정주연 2005.02.03 1296 192
722 블루스를 추고 싶다 - 함태숙 2005.02.01 1150 196
721 포레스트검프 - 문석암 [3] 2005.01.27 1331 220
720 잔디의 검법 - 강수 [1] 2005.01.26 1114 219
719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07 178
718 리필 - 이상국 [2] 2005.01.21 1454 192
717 나는 사유한다 비전을 접수한다 - 신지혜 [1] 2005.01.20 1393 229
716 소나무 - 마경덕 [1] 2005.01.19 1867 201
715 네 사소한 이름을 부르고 싶다 - 박소원 [1] 2005.01.18 1656 215
714 목내이 - 김자흔 2005.01.13 1183 168
713 내출혈 - 허금주 [3] 2005.01.10 1262 183
712 나의 처음 - 윤의섭 2005.01.04 1542 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