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송곳> / 안효희/ 1999년《시와사상》으로 등단
물방울 송곳
하수구를 내려온 물들이,
배관 속의 질서를 벗어난 물들이
똑 똑 똑
시간을 배분하여 떨어진다
석고보드 벽면을 타고 흐르던
은밀한 꿈이
초록빛 곰팡이꽃을 피운다
하릴없는 후회와 반성으로
끌끌 혀를 차고 있을 때
꽃의 거대한 힘에 짓눌린
아랫집 벽이 무릎을 꿇는다
단절의 두려움이 무너진다
덩어리진 결핍이 톱질 당한다
수많은 부재를 흔들고 뒤집고 부수는
물
방
울
은
송
곳
이
다
떨어지는 물과 물의 사이를
떨어지는 시간과 시간의 사이를
하염없이 쿡쿡 찌르는
물방울은, 그리고 침묵하는 송곳은
전율하는 피뢰침이다
생각 열 하나
생각 열 둘
젖어 그렁그렁 넘치는
송곳은 정수리를 뚫는다
[감상]
물방울 떨어질 때 시각과 청각의 예민한 반응이 한 편의 시로 응축됩니다. 액체인 물방울을 송곳으로 만들어가는 상상력이 돋보이고, 낙하하는 물방울 모양을 '시간을 배분'하는 것으로 관념화시키는 조형감도 인상적입니다. 기실 물방울이 시멘트 바닥을 뚫거나, 혹은 그 스스로 기둥이 되리란 걸 새삼 상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