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처음 / 윤의섭/ 《현대시학》2005년 1월호
나의 처음
내가 처음 여자를 안 때는
옆집 누나의 알 수 없는 향기를 더듬거리던 열네 살
칠흑 같은 밤은 온 몸을 옥죄어 들었다
내가 처음 갈매기의 꿈을 읽었을 적에
석양으로 이지러진 하늘에선 비행운 한 줄기
그토록 지워지지 않는 상형문자의 시대
이 모든 사건보다 더 많은 첫경험이 있었겠지만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 같은 아티스트는
비슷한 시기에 요절했어도 지금껏 늙지 않고 라디오 속에 살아 있다
내게는 처음 본 풍경이 잊혀진 때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여행 중이었거나
때마침 부는 바람에 담긴 숲을 보다가 곧바로 바람이 죽었거나
나는 또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잊혀진 사람일 수 있다
마지막 지구인이 지상에서 사라질 때
나뭇잎 하나도 그 때문에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나는 또 처음 누군가를 잊었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에도 꽃은 피었고 계절은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것만을 기억한다
[감상]
잊혀진다는 것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어둑한 기억의 심연 속 영원히 침전되어버린 그 무엇일까요. 그러다 영영 떠오르지 않는 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고 이미지만 떠올려지는 건 아닌지. 이 시는 ‘잊혀지는 것’에 대한 아련한 느낌이 좋습니다. 필경 ‘잊혀지는 것’은 기억과 분리된 채 완전히 소멸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변주된 기억으로 떠오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