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2011.02.11 12:52

윤성택 조회 수:1824 추천:128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김성대 (2005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 《민음의 시》170

          겨울 모스크바 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눈 덮인 벌판에 서 있었다
        
        겨울에 대한 끊임없는 여백
        읽을 때마다 다른 곳에 있는 문장들
        욕조에 물을 받듯이 그것을 옮겨 적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기침과 침묵에 대해 쓰면 얼음이 되어 닿았다
        묘지에서 돌아오는 저녁 입김에 대해 쓰면
        얼음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되어 닿았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긴 복도에 서 있었다

        우리말은 다 잊은 것인지
        우리는 여백을 헤매고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를 빠져나가는 공기에 대해 쓰면
        창의 뒷면이 되어 닿았고
        창에 입김을 불어도 글자가 쓰여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을 문장들
        겨울에 대한 장문의 여백

        여백을 고쳐 쓰면서도 우리의 문장은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감상]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진 편지를 받아보았거나 보낸 적이 언제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편지는 어느새 우리의 일상에서 인쇄체의 것들로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우리의 마음속 물결무늬 소인과 함께 아직도 존재합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때의 감정 느낌들은 고스란히 이 겨울의 풍경에서 불러낼 수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의 골몰한 마음이 여백을 채워가지만, 그 편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이해되고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쓸쓸함이 이곳에 깃들어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824 128
1170 한순간 - 배영옥 [1] 2011.02.08 1520 123
1169 잠 속의 잠 - 정선 [1] 2011.02.07 1316 119
1168 구름 편력 - 천서봉 [1] 2011.02.01 1199 128
1167 부리와 뿌리 - 김명철 [1] 2011.01.31 1044 109
1166 부레 - 박현솔 2011.01.29 860 108
1165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 류근 2011.01.28 1296 114
1164 불우를 씻다 - 유정이 2011.01.27 953 112
1163 죽도록 - 이영광 [1] 2011.01.26 1268 111
1162 녹색 감정 식물 - 이제니 2011.01.24 1117 123
1161 눈을 감으면 - 김점용 [1] 2011.01.22 2529 113
1160 밤의 편의점 - 권지숙 2011.01.20 1125 99
1159 무가지 - 문정영 2011.01.18 948 103
1158 따뜻한 마음 - 김행숙 2011.01.17 1678 95
1157 빙점 - 하린 2011.01.15 988 81
1156 내 그림자 - 김형미 2011.01.14 1058 84
1155 그믐 - 김왕노 2011.01.13 820 75
1154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2011.01.12 1130 78
1153 바다의 등 - 차주일 2011.01.11 834 67
1152 와이셔츠 - 손순미 2011.01.10 779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