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김성대 (2005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 《민음의 시》170
겨울 모스크바 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눈 덮인 벌판에 서 있었다
겨울에 대한 끊임없는 여백
읽을 때마다 다른 곳에 있는 문장들
욕조에 물을 받듯이 그것을 옮겨 적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기침과 침묵에 대해 쓰면 얼음이 되어 닿았다
묘지에서 돌아오는 저녁 입김에 대해 쓰면
얼음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되어 닿았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긴 복도에 서 있었다
우리말은 다 잊은 것인지
우리는 여백을 헤매고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를 빠져나가는 공기에 대해 쓰면
창의 뒷면이 되어 닿았고
창에 입김을 불어도 글자가 쓰여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을 문장들
겨울에 대한 장문의 여백
여백을 고쳐 쓰면서도 우리의 문장은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감상]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진 편지를 받아보았거나 보낸 적이 언제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편지는 어느새 우리의 일상에서 인쇄체의 것들로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우리의 마음속 물결무늬 소인과 함께 아직도 존재합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때의 감정 느낌들은 고스란히 이 겨울의 풍경에서 불러낼 수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의 골몰한 마음이 여백을 채워가지만, 그 편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이해되고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쓸쓸함이 이곳에 깃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