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을 단상

2003.10.01 15:52

윤성택 조회 수:485 추천:5



밤마다 나는 터번을 두른 사내가 되어
이 지상에 마지막뿐인
사막을 걷는 꿈을 꾸곤 한다.
내가 살아 남은 유일한 이유는
낙타표 성냥을 쥐고 있었다는 점.

그녀의 얼굴에 몇 개의 점이 있는지
나는 유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가끔씩 그것이 나에게 있어
별자리와 같았던 것일까.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나는 왜 남의 손금을 봐주는 것일까.
그 손금에 손가락을 대고 따라가며
읽히지도 않는 두터운 영문판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막막한 그 세월을 느껴보는 것.
여자의 손은 가늘고 길었다.

나는 시들지 않는 선인장 화분이
모니터 앞에 두 개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의 유약한 의식의 흐름과
나의 욕망에 의한 점철된 시선을
한번쯤 넘보면서
물도 주지 않는 놈.
불경스런 나를 탓하고 있을.

출근길에 시멘트 축대를 기어올라가는
담쟁이를 보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치 하늘로 엎질러진 것만 같다.
어떤 기호를 만들며
내게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담쟁이는 그 끝 중지손가락으로 한껏 뻗어 놓고
숨이 넘어갈 듯 바람 끝에 머문다.

어스름이 구름들을 감아간다.
오늘도 나는 탈출을 위한 탈출도 아닌
어정쩡한 제스처로 슬리퍼를 벗고
신발을 갈아 신을 것이다.
그리고 낡은 내 신발이 안내하는 곳에 가서
밤 동안 말없이 죽어지낼 것이다.

아버지,
꿈속에서 아버지는 맨발이셨다.
밖에는 바람이 그렇게 부는데
아버지는 맨발로 술에 취해 걸어 오셨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버지의 신발을 찾으러 갔다.
가을 산들이 온통
벌겋게 취해 있었다.



2001.9.10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67 2004년 12월 31일에게, 그리고 2005.02.03 664
66 신춘문예의 계절 2003.11.27 639
65 견딜만 하다 2003.06.24 639
64 집에 가는 길 2002.07.02 628
63 시를 위하여 2003.10.25 613
62 장마 2002.05.16 583
61 어느 시인의 죽음 2003.11.20 571
60 어둠을 터 주던 알람소리 2009.11.04 564
59 겨울비 [2] 2002.12.16 561
58 첫눈 [2] 2002.11.13 538
57 늦은 아침 2003.07.30 530
56 크리스마스 이브, [1] 2003.12.24 529
55 기억하라 추억하라 secret 2008.10.15 528
54 무협지, 시간과 공간의 역동성 [1] 2008.05.26 522
53 김솔에게 - 너의 만연체가 말해 주는 것 [1] 2003.08.26 513
52 [詩作노트] 실종 2003.04.29 506
51 책상에 앉아 나는 2002.06.10 505
50 어느 겨울 하루키를 떠올리다 2001.06.12 501
» 가을 단상 [1] 2003.10.01 485
48 이창호 [그대 꿈길을 돌아] 시집 해설 / 동길사 2001.06.15 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