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을 단상

2003.10.01 15:52

윤성택 조회 수:495 추천:5



밤마다 나는 터번을 두른 사내가 되어
이 지상에 마지막뿐인
사막을 걷는 꿈을 꾸곤 한다.
내가 살아 남은 유일한 이유는
낙타표 성냥을 쥐고 있었다는 점.

그녀의 얼굴에 몇 개의 점이 있는지
나는 유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가끔씩 그것이 나에게 있어
별자리와 같았던 것일까.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나는 왜 남의 손금을 봐주는 것일까.
그 손금에 손가락을 대고 따라가며
읽히지도 않는 두터운 영문판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막막한 그 세월을 느껴보는 것.
여자의 손은 가늘고 길었다.

나는 시들지 않는 선인장 화분이
모니터 앞에 두 개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나의 유약한 의식의 흐름과
나의 욕망에 의한 점철된 시선을
한번쯤 넘보면서
물도 주지 않는 놈.
불경스런 나를 탓하고 있을.

출근길에 시멘트 축대를 기어올라가는
담쟁이를 보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치 하늘로 엎질러진 것만 같다.
어떤 기호를 만들며
내게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담쟁이는 그 끝 중지손가락으로 한껏 뻗어 놓고
숨이 넘어갈 듯 바람 끝에 머문다.

어스름이 구름들을 감아간다.
오늘도 나는 탈출을 위한 탈출도 아닌
어정쩡한 제스처로 슬리퍼를 벗고
신발을 갈아 신을 것이다.
그리고 낡은 내 신발이 안내하는 곳에 가서
밤 동안 말없이 죽어지낼 것이다.

아버지,
꿈속에서 아버지는 맨발이셨다.
밖에는 바람이 그렇게 부는데
아버지는 맨발로 술에 취해 걸어 오셨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아버지의 신발을 찾으러 갔다.
가을 산들이 온통
벌겋게 취해 있었다.



2001.9.10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67 나였던 기억 2004.01.07 933
66 크리스마스 이브, [1] 2003.12.24 547
65 편지 [1] 2003.12.11 871
64 대학원, 2003.12.09 788
63 신춘문예의 계절 2003.11.27 653
62 어느 시인의 죽음 2003.11.20 587
61 시를 위하여 2003.10.25 626
60 귤로 물들다 2003.10.13 404
» 가을 단상 [1] 2003.10.01 495
58 김솔에게 - 너의 만연체가 말해 주는 것 [1] 2003.08.26 524
57 늦은 아침 2003.07.30 548
56 두근두근 소곤소곤 2003.07.21 440
55 '오노 요코'전을 보고 [2] 2003.07.08 357
54 견딜만 하다 2003.06.24 651
53 나는 지금, 2003.06.17 490
52 선생님을 돌려주세요 2003.05.16 382
51 [詩作노트] 실종 2003.04.29 521
50 그런 날 2003.04.29 447
49 박성우 [거미] (창작과비평사) 시집 읽기 2003.04.08 462
48 소리 지른 사람은 저입니다 2003.04.02 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