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 동인 / 김종보
빛을 파는 가게
정전된 골목엔 호박잎 그늘만한 어둠이 풀풀 자라난다
장대로 따낸 잘 익은 가로등도 걱정거리 엉켰는지
수은 가득 찬 과육이 새까맣게 썩어간다
사람들이 어둠의 어린 순을 밟으며 몰려드는 거기
언제나 환하게 빛나는 시장통 모퉁이,
오래 전부터 뿌리내린 청과물 상회
천장마다 얼기설기 긴 전선에 매달린 백열전구들
시들지 않는 불빛에서 벌써부터 단내가 난다
이 꼬마 전구 맛 좀 볼라우
방울토마토 한 바구니 앙증맞게 빛나고 있다
철지난 거지만 할로겐등은 떨이니 거저 드리리다
수류탄처럼 근육질의 참외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다
어느새 앙상하게 갈증난 가지마다 한 봉지씩 등이 걸리면
여름밤 시장통 골목은 순식간에 성탄목처럼 환해진다
수박은 몇 볼트의 전선을 이어주면 빛이 날까요?
주인 아줌마는 이응발음의 둥근 몸매를 끌고 나와
저울 위에 수박을 올려두고 빛의 근수를 단다
통통 두드려보며 불신의 껍질이 너무 두껍지 않냐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마침내 날카로운 플러그까지 꽂는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수박 한 통
붉은 연등을 켜고 새까만 필라멘트들 촘촘히 박혀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초식동물처럼 즐거워라!
삼각의 콘센트 한 조각 냉큼 베어 물면
이응 투성이 아줌마의 목소리가 방전된다
사실 말이지, 우리 가게 백열전구는 넝쿨 식물이라우
[감상]
가끔 시적인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이 시를 처음 보았을 때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구나. 수박에서 빛이라니. "수박은 몇 볼트의 전선을 이어주면 빛이 날까요?" 이 물음.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 일상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상식에 머물고 상식에 젖어 관성처럼 삶을 살고는 있는 것은 아닐까. 발상이 좋으니 그 자체가 하나의 좋은 시로 다가옵니다. 어떻습니까? 주위에서 이런 것 한번 찾아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