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2:24

윤성택 조회 수:1694 추천:322

『빈터』 동인 / 김종보


        빛을 파는 가게


        정전된 골목엔 호박잎 그늘만한 어둠이 풀풀 자라난다
        장대로 따낸 잘 익은 가로등도 걱정거리 엉켰는지
        수은 가득 찬 과육이 새까맣게 썩어간다
        사람들이 어둠의 어린 순을 밟으며 몰려드는 거기
        언제나 환하게 빛나는 시장통 모퉁이,
        오래 전부터 뿌리내린 청과물 상회
        천장마다 얼기설기 긴 전선에 매달린 백열전구들
        시들지 않는 불빛에서 벌써부터 단내가 난다
        이 꼬마 전구 맛 좀 볼라우
        방울토마토 한 바구니 앙증맞게 빛나고 있다
        철지난 거지만 할로겐등은 떨이니 거저 드리리다
        수류탄처럼 근육질의 참외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다
        어느새 앙상하게 갈증난 가지마다 한 봉지씩 등이 걸리면
        여름밤 시장통 골목은 순식간에 성탄목처럼 환해진다
        수박은 몇 볼트의 전선을 이어주면 빛이 날까요?
        주인 아줌마는 이응발음의 둥근 몸매를 끌고 나와
        저울 위에 수박을 올려두고 빛의 근수를 단다
        통통 두드려보며 불신의 껍질이 너무 두껍지 않냐고
        실랑이가 벌어지고 마침내 날카로운 플러그까지 꽂는다
        순간 망설임도 없이 반쪽으로 갈라지는 수박 한 통
        붉은 연등을 켜고 새까만 필라멘트들 촘촘히 박혀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초식동물처럼 즐거워라!
        삼각의 콘센트 한 조각 냉큼 베어 물면
        이응 투성이 아줌마의 목소리가 방전된다
        사실 말이지, 우리 가게 백열전구는 넝쿨 식물이라우



[감상]
가끔 시적인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되는데요. 이 시를 처음 보았을 때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구나. 수박에서 빛이라니. "수박은 몇 볼트의 전선을 이어주면 빛이 날까요?" 이 물음. 살아가면서 우리는 너무 일상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상식에 머물고 상식에 젖어 관성처럼 삶을 살고는 있는 것은 아닐까. 발상이 좋으니 그 자체가 하나의 좋은 시로 다가옵니다. 어떻습니까? 주위에서 이런 것 한번 찾아보실래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1 울고 있는 아이 - 배용제 2001.08.03 1494 254
90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 - 이솔 2001.08.02 1359 242
89 기차는 간다 - 허수경 [2] 2001.08.01 1568 236
88 나는 시간을 만든다 - 박상순 2001.07.31 1437 255
87 낡은 의자 - 김기택 [1] 2001.07.30 1574 248
86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00 268
85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2001.07.23 1320 302
84 온라인 - 이복희 2001.07.20 1361 306
83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2001.07.19 1574 291
82 카페 리치에서 - 곽윤석 [3] 2001.07.18 1570 304
»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80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620 337
79 사랑니 - 고두현 [1] 2001.07.11 1841 258
78 첫사랑 - 하재봉 2001.07.09 1892 306
77 꿈 101 - 김점용 2001.07.06 1618 279
76 중독 - 조말선 2001.07.05 1617 288
75 내 안의 골목길 - 위승희 [2] 2001.07.03 1517 269
74 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2001.07.02 1970 274
73 그대들의 나날들 - 마종하 2001.06.29 1522 319
72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49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