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그림자를 가진 새 - 윤이나

2002.08.02 18:52

윤성택 조회 수:1269 추천:190

그림자를 가진 새/ 윤이나/ 『현대시문학』여름호 (2002)


        그림자를 가진 새
  

  뒤 뜰, 유독 오동나무 아래만 어둡다 십 년 전 내가 묻은 해바라기 씨를
파먹는다 그 새가.  야금야금 글쎄 왜 그 긴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널브러
진 그림자는 내버려두고 해바라기 씨만 주워먹는지  그 새가.  가끔 오동
나무아래에  사는 민들레에게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날개를 뚝 떼어놓고
우물가로 저벅거리며 걸어간다  두레박을 보고서야 두고 온 날개가 기억
났다 그 새가. 그냥 우물 안으로 머리를 쑥 밀어 넣었다 이상하게 정오에
멈춘 초침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림자가 습관적으로 기침을 할 때마다
부러진 시간들이 컹컹거리며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무모하게 담을 넘
으려는 장미 넝쿨을 나무란다 그 새가. 놀란 장미 넝쿨은 잎을 이끌고 담
장 안으로 꽃을 내려보낸다 오동나무 아래서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다 그
새가. 그림자를 덮고서



[감상]
결국 시는 현실과 다른 그 어떤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자신만의 허구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된 것들을 문학적으로 조직한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경험이 없는 토대 위에 시가 있다면 허약한 넋두리이거나 무의미한 나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문학의 언어로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은 다름 아닌 우리의 군상들이며, 무의식적으로 흘러갔던 나의 과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인과가 아니라 "새"로 점철된 자아인 것입니다. 이런 방면으로 독특하다면 김점용 시인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시의 방향성은 그가 갖고 있었던 "강박"에서 벗어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게 되네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외부의 세계를 주관의 세계로 끌어당겨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끔 만드는 노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참 색깔 있는 시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23689 98
1190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698 191
1189 절정 - 함성호 2011.04.25 4059 157
1188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3643 0
1187 행복 - 이대흠 [2] 2011.03.18 3635 182
1186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1185 봄비 - 서영처 2006.01.14 3275 276
1184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1183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3 294
1182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4 281
1181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
1180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
1179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178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177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176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175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1 306
1174 유리꽃 - 이인철 2006.04.03 2589 253
1173 이별 - 정양 2006.03.02 2542 287
1172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