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가진 새/ 윤이나/ 『현대시문학』여름호 (2002)
그림자를 가진 새
뒤 뜰, 유독 오동나무 아래만 어둡다 십 년 전 내가 묻은 해바라기 씨를
파먹는다 그 새가. 야금야금 글쎄 왜 그 긴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널브러
진 그림자는 내버려두고 해바라기 씨만 주워먹는지 그 새가. 가끔 오동
나무아래에 사는 민들레에게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날개를 뚝 떼어놓고
우물가로 저벅거리며 걸어간다 두레박을 보고서야 두고 온 날개가 기억
났다 그 새가. 그냥 우물 안으로 머리를 쑥 밀어 넣었다 이상하게 정오에
멈춘 초침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림자가 습관적으로 기침을 할 때마다
부러진 시간들이 컹컹거리며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무모하게 담을 넘
으려는 장미 넝쿨을 나무란다 그 새가. 놀란 장미 넝쿨은 잎을 이끌고 담
장 안으로 꽃을 내려보낸다 오동나무 아래서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다 그
새가. 그림자를 덮고서
[감상]
결국 시는 현실과 다른 그 어떤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자신만의 허구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경험된 것들을 문학적으로 조직한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경험이 없는 토대 위에 시가 있다면 허약한 넋두리이거나 무의미한 나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문학의 언어로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시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은 다름 아닌 우리의 군상들이며, 무의식적으로 흘러갔던 나의 과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의 인과가 아니라 "새"로 점철된 자아인 것입니다. 이런 방면으로 독특하다면 김점용 시인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시의 방향성은 그가 갖고 있었던 "강박"에서 벗어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게 되네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외부의 세계를 주관의 세계로 끌어당겨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끔 만드는 노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참 색깔 있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