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사람/ 김형미/ 2000년 진주신문 신춘문예 당선자
죽은 사람
무덤 속에서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산 사람처럼 노가리를 찢었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군, 그가 나직이 내뱉자
컴컴한 무덤 안이 순간적으로 시끄러워졌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건전지 떨어져가는 시계의 초침이 틱틱거릴 뿐
확대된 동공 안으로 잡혀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햇빛 한오라기 들어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 것 같은 문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입을 벌리고 감히 나갈 수 없었다!
진짜 두려운 것은 자신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무덤 안에 갇혀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니 그보다 무덤 밖에 세상을 가두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그는 알고 있었다
술잔을 들다 말고
허여멀겋게 색 잃은 손가락을 잠시 노려보았다
술잔을 잡을 힘으로 삶을 거머쥐었던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의 가는 입술이 자조하듯 웃었다
반으로 갈린 노가리가 뼈를 드러내고 따라 웃었다
아침 저녁으로 맨손 체조를 해도
아래로 쏠리는 뱃살이 그를 더욱 못견디게 만들었다
노가리처럼 반으로 갈라 창자를 드러내고
안주삼아 오독오독 씹어 먹어버렸으면
어둠이 고장난 지퍼처럼 벌어지자
가둬 놓았던 세상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마치 산 사람처럼,
[감상]
시를 읽으니 슬퍼지네요. 무덤으로 가신 아버지. 어쩌면 저리 생각하고 계실까 싶어서. 지금 어디쯤 백지처럼 하얗게 지워진 기억으로 生의 다른 순간을 기다리고 계실까 싶어서. 이 시는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합니다. 특히 "무덤 밖에 세상을 가두는 일"과 같은 직관력이 출중하고요. 마을과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선산, 아버지가 세상을 열고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신 入口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