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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여인숙 2 - 최갑수

2002.07.23 10:24

윤성택 조회 수:1135 추천:181


『단 한 번의 사랑』/ 최갑수 / 문학동네

          
       밀물여인숙 2
                                  
        바다가 밤을 밀며
        성큼 뭍으로 손을 내밀고
        아낙들이 서둘러
        아이들을 부른다 겨울밤은
        폐선의 흔들림을 감당하기에도
        벅차고 내 잠을 밀고
        촘촘히 올라오는 잡어떼
        별처럼 삼십 촉 백열구가 떴다
        아직도 잠들지 못한 걸까,
        홑이불 속
        사고 싶은 것이 많다는 그 여자도
        따라 뒤척인다 뒤척인 자리마다
        모래알들이 힘없이 구르고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등
        나는 입술을 대고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러본다
        그 여자의 등이 조금씩 지워진다
        어느 땐가 내가 서 있었던 해변과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해보던
        사납던 그 밤도 지워진다
        여자의 등에 소슬하게 바람이 일고
        만져줄까, 하얗게 거품을 무는
        그녀의 얇은 허리와 하루 종일
        창문을 벗어나지 못하는 섬
        집이 없는 사내들이
        모서리 한 켠씩을 차지해
        저마다 낮은 어깨를 누인다
        지붕 위에는 밤안개가
        오래오래 머문다


[감상]
어제 떠났던 막배가 이 섬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지금 밖은 장맛비가 내리고, 시집 속 밀물여인숙에 내 눈길도 따라 투숙합니다. 이 시인의 시편들의 정서가 마음에 듭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정태춘의 "촛불" 노래가 좋더라고 했더니 어느 분이 은근히 언짢아하더군요. 그 분 술이 적당히 올라오자 그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너희들 노래가 있지 않느냐, 왜 우리 노래를 네가 부르느냐. 이 황당한 말에 한참을 웃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개성이란 변화와 혁신이라며, 새로움이 없는 낡은 관념의 시를 쓰고 있지는 않느냐고 나에게 묻더군요. 그러나 시란 낯익은 정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서를 온몸으로 끝 갈 데까지 밀고가야 하지 않을까요. 가랑가랑 시에 젖다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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