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그리기/ 이승하/ (1984) 대한민국문학상 수록작품 中
바람 그리기
황혼의 감천*으로 너를 보낸다 누이야
네가 혼자 사분거리다 냇둑을 뛰어가면
다옥한 네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빛났다
망각의 시내 이편에서 나는 지켜보았다, 너는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두려움 하나 없이
오롯이 옷을 벗었다
하나씩 발 아래 옷이 쌓이면
도리암직한 네 몸 청동빛이 났다
그때 감천은 무르춤하였고,
깊이깊이 한숨짓는 바람의 다발
울음 참고 나는 오래 지켜보아야 했다
그 무력했던 날들
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
낮에 웃고 밤에 바장이고
혼자 웃고 혼자 흐느끼고
잘 쉬어라 쉬어
네 곁에서 나직이 휘파람 불면
누이는 일어나 두 팔 아느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나서
혼자 가만가만 웃다 바람이 이끌면
네 혼을 불러내는 정든 시내
그 냇둑에 서서 바람을 그리겠다고
바람의 매무새를 그리겠다고
감천아, 감천의 바람아, 착란의 이 땅아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란다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없단다
버려진 내 누이, 너는 아직 곱게도 미쳐……
*감천(甘川):김천시 외곽을 흐르는 시내.
[감상]
고등학교 시절, 가끔 운동장에 찾아오는 온통 백지인 女子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항상 대못이 하나 쥐어져 있고, 어느 별의 언어인지 으으으- 가끔씩 내뱉습니다. 이 시를 읽으니, 그녀가 생각납니다. 어쩌다 저리 여백을 지니고 다닐까, 수없이 썼다가 지워지는 소문들. 이 시의 감천은 어쩌면 기억과 삶을 갈라놓는 하천일지도 모릅니다. 그예 강을 건너 되돌아오지 않는 누이, 참 많은 생각이 감천을 건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