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역류 - 정재학

2008.07.18 17:06

윤성택 조회 수:1288 추천:110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 정재학 (1966년 『작가세계』로 등단) / 《민음사》(2008)


  역류

전화가 왔다 오랜 친구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친
구는 대답이 없고  심한 잡음 너머  두 사람이 얘기를 나
누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소음과 섞이지 않는  대화가 조
금씩 확대되었다  내 목소리가 꾸물꾸물 수화기를  비집
고 기어 나왔다 고등학생 때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
지만 우리의 대화는  손마디를 느끼는 것처럼 생생했다
우리는 여자 친구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고 담임 욕을 하
기도 했다 그냥 그런 얘기들이었다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내일 학교  끝나고 수돗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항상 수도를 잠그지 않는 애들이 있
었다 모두 무관심하게 지나쳤다  그 물은 지금도 넘치고
있을까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 그 오랜 시간 어디쯤에서
반사되어 다시 나에게 온 것일까
어디로 다시 떠나는 것일까 우리의 대화는


[감상]
기억은 잡음과도 같은 물리적 시간을 거슬러 원하는 것을 불러내는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친구와의 대화에 끼어드는 ‘소음’이 인식의 전환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동감>의 스토리처럼 과거로 몰입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워 흐름이 전혀 거슬리지 않습니다. ‘수도를 잠그지’ 않는다는 것. 과거는 미래로 열려 있으니, 역으로 미래는 과거를 전제로 흘러왔을 것입니다. 그 통로와도 같은 현재에 잠그지 않는 수돗물처럼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때 나눠가졌던 추억이 지금 어딘가, 이 시간 누구의 기억 어딘가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23689 98
1190 위험한 그림 - 이은채 [1] 2005.02.25 15698 191
1189 절정 - 함성호 2011.04.25 4059 157
1188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3643 0
1187 행복 - 이대흠 [2] 2011.03.18 3635 182
1186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1185 봄비 - 서영처 2006.01.14 3275 276
1184 추억 - 신기섭 [6] 2005.12.06 3154 232
1183 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 [2] 2001.04.03 3113 294
1182 꽃피는 아버지 - 박종명 [4] 2001.04.03 3084 281
1181 해바라기 - 조은영 [1] 2005.11.01 3023 251
1180 사랑은 - 이승희 2006.02.21 2977 250
1179 별 - 김완하 2002.08.12 2923 249
1178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177 고백 - 정병근 [1] 2005.08.17 2711 250
1176 싹 - 김지혜 2005.12.27 2666 266
1175 그물을 깁는 노인 - 김혜경 [1] 2001.04.09 2631 306
1174 유리꽃 - 이인철 2006.04.03 2589 253
1173 이별 - 정양 2006.03.02 2542 287
1172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