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 정재학 (1966년 『작가세계』로 등단) / 《민음사》(2008)
역류
전화가 왔다 오랜 친구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친
구는 대답이 없고 심한 잡음 너머 두 사람이 얘기를 나
누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소음과 섞이지 않는 대화가 조
금씩 확대되었다 내 목소리가 꾸물꾸물 수화기를 비집
고 기어 나왔다 고등학생 때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
지만 우리의 대화는 손마디를 느끼는 것처럼 생생했다
우리는 여자 친구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고 담임 욕을 하
기도 했다 그냥 그런 얘기들이었다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내일 학교 끝나고 수돗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항상 수도를 잠그지 않는 애들이 있
었다 모두 무관심하게 지나쳤다 그 물은 지금도 넘치고
있을까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 그 오랜 시간 어디쯤에서
반사되어 다시 나에게 온 것일까
어디로 다시 떠나는 것일까 우리의 대화는
[감상]
기억은 잡음과도 같은 물리적 시간을 거슬러 원하는 것을 불러내는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친구와의 대화에 끼어드는 ‘소음’이 인식의 전환지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동감>의 스토리처럼 과거로 몰입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워 흐름이 전혀 거슬리지 않습니다. ‘수도를 잠그지’ 않는다는 것. 과거는 미래로 열려 있으니, 역으로 미래는 과거를 전제로 흘러왔을 것입니다. 그 통로와도 같은 현재에 잠그지 않는 수돗물처럼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때 나눠가졌던 추억이 지금 어딘가, 이 시간 누구의 기억 어딘가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