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선명한 유령 - 조영석

2004.11.15 10:42

윤성택 조회 수:1086 추천:165

「선명한 유령」/  조영석/  ≪문학동네≫2004년 가을호, 신인상 수상작 中


        선명한 유령

        그는 일종의 유령이므로 어디든 막힘없이 떠돌아다닌다.
        그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다.
        다만, 개들이 알아채고 짖을 뿐이며 비둘기들이 모여들 뿐이다.

        그에게는 땅이 없지만 발을 딛는 곳이 모두 그의 땅이다.
        그는 사람의 집이 아닌 모든 집에 세 들어 살 수 있다.
        쥐와 함께 자기도 하며, 옷 속을 바퀴벌레에게 세 주기도 한다.

        그의 땅은 기후가 사납다.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모래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없다. 그가 지나가면 그의 땅은 사라지므로.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물과 먼지를 빨아들여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그의 옷은 그의 살갗이다.

        그의 몸은 카드와 화투 마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것들을 먹었는지 그것들이 그를 먹었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발효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썩어가는 생선대가리 냄새가 난다.

        사람들, 저마다 작은 집과 작은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몸만큼의 권리를 지닌 채 실려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칠 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우면 의자는 침대가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객차가 되었다.
        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는 냄새의 포자를 뿌리며 번식한다.
        포자를 덮어쓴 사람들은 잠재적 유령이 된다.

        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유령이다.



[감상]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유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유령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랑자입니다. 묘하게도 유령에 대한 두려움이라든가 혹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전조까지 이 시는 ‘그’와 ‘유령’을 동일한 것으로 묘사해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제 유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명한’ 실존의 것입니다. 이 접점에서 시적인 직관이 작용된 것이겠지요. 지하철을 떠도는 그는 '무관심' 때문에 도통 보이지 않았던 유령인 셈입니다. 그가 곁에 왔을 때 그의 실존에 두려움을 느끼며 코를 틀어막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11 어도 여자 - 김윤배 2007.06.07 1083 138
1010 자유낙하운동 - 권주열 2003.12.20 1084 205
1009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1008 움직이는 정물 - 김길나 2003.09.26 1086 183
» 선명한 유령 - 조영석 2004.11.15 1086 165
1006 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 김윤희 2003.01.29 1087 196
1005 공중부양 - 박강우 2004.04.12 1087 225
1004 연두의 시제 - 김경주 [1] 2009.12.02 1087 119
1003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2011.01.12 1087 78
1002 처용암에서 1 - 김재홍 2003.09.24 1088 195
1001 프랑켄슈타인 - 김순선 2004.06.17 1088 174
1000 론강의 별밤, 테오에게 - 박진성 2002.05.07 1089 190
999 비닐하우스 밤기차 - 이승주 2011.02.21 1089 116
998 골목의 캐비넷 - 정병근 2003.10.27 1090 192
997 시,시,비,비 - 김민정 2010.01.16 1090 116
996 그의 바다는 아직 살아 있다 - 박현주 2002.10.29 1092 180
995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 강미정 2003.02.03 1092 169
994 구멍에 들다 - 길상호 2003.06.10 1092 154
993 구관조 - 전정아 2007.05.31 1092 166
992 이장 - 한승태 2002.06.18 1094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