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낡은 침대 - 박해람

2006.07.22 14:45

윤성택 조회 수:1918 추천:219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 가는 사내》 / 박해람/ 《문예중앙》시인선


        낡은 침대

        모든 힘이 빠진 한 사내가 후줄근하게 돌아와
        꽤 오래되고 낡은 충전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몸에 딱 맞는 배터리
        푹신하고 깊은 잠이 넘쳐나는 낡은 침대 안으로
        안경을 벗고 조용히
        그의 관절들이 혁대를 풀고 잠든다.
        얇은 모기장과, 빛의 속도로 몇억 광년쯤 날아온 듯한 낮은 스탠드 불빛,
        그러고 보니 저 낡은 침대와 연결된 코드는
        대기권 밖인지도 모른다.

        몇 번의 뒤척임으로 사내는 온몸에
        잠을 골고루 바른다.
        신선하고 맑은 힘이 온몸으로 퍼진다.
        지지직거리는 몇 마디의 잠꼬대가 몸 밖으로 버려지고
        꿈과 꿈들 사이에 부드럽고 말랑한 연골이 채워진다.
        피로와 힘겨움 같은 것들을 밤새 먹어치우는 거대한 짐승,
        결국, 저 사내도 언젠가는 저 침대의 먹이가 될 것이다.

        간혹, 삐걱이며 새어나오는 전류
        버려진 꿈들의 폐기장
        산더미처럼 쌓인 저 권태와 피곤함이 배어 있는 덩어리,
        점점 충전 속도가 떨어져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저 사내
        어쩔 수 없이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저 사내.


[감상]
침대를 <낡은 충전기>로 보는 탁월한 시적상상력이 시선을 끄는 시입니다. 더욱이 충전기로 보내는 에너지 코드를 <몇억 광년>으로 확장시킴으로서, 일상적인 <잠>의 의미를 생명의 기원까지 내다보게 합니다. 온몸에 잠을 골고루 바른다거나 잠꼬대가 몸 밖으로 버려지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 대상의 물성(物性)을 꿰뚫어 그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도 낯설면서 새로운 이 시의 묘미입니다. 등단 8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인 만큼 편편마다 단단한 공력이 뭉쳐 두툼한 시집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31 총잡이들의 세계사 - 안현미 [1] 2006.02.23 1612 233
930 편지에게 쓴다 - 최승철 2001.05.22 1612 261
929 가을, 도서관에서 - 남궁명 [2] 2004.10.14 1609 226
928 고래는 울지 않는다 - 마경덕 [1] 2004.02.20 1609 226
927 김밥 마는 여자 - 장만호 2001.05.15 1609 298
926 보고 싶은 친구에게 - 신해욱 [1] 2007.09.19 1608 106
925 떨어진 사람 - 김언 2005.10.12 1606 189
924 목격자 - 구석본 2006.01.25 1604 194
923 누가 우는가 - 나희덕 [1] 2004.11.23 1604 173
922 나무야 나무야 바람아 - 오규원 2007.02.07 1602 200
921 겨울 밤에 시쓰기 - 안도현 2002.02.23 1601 181
920 움직이는 별 - 박후기 [1] 2003.12.04 1598 238
919 12월의 숲 - 황지우 [3] 2001.11.07 1598 203
918 하늘우체국 - 김수우 2003.09.12 1597 172
917 봄날의 부처님 - 김애리나 [1] 2005.12.13 1595 206
916 사랑한다는 것은 - 최정숙 2003.01.24 1595 187
915 강가의 묘석 - 김병호 2006.01.23 1592 255
914 18세 - 박상수 2004.06.03 1590 230
913 기차 소리 - 심재휘 [1] 2005.06.15 1589 204
912 아코디언 연주자 - 김윤선 2009.05.18 1588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