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 가는 사내》 / 박해람/ 《문예중앙》시인선
낡은 침대
모든 힘이 빠진 한 사내가 후줄근하게 돌아와
꽤 오래되고 낡은 충전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의 몸에 딱 맞는 배터리
푹신하고 깊은 잠이 넘쳐나는 낡은 침대 안으로
안경을 벗고 조용히
그의 관절들이 혁대를 풀고 잠든다.
얇은 모기장과, 빛의 속도로 몇억 광년쯤 날아온 듯한 낮은 스탠드 불빛,
그러고 보니 저 낡은 침대와 연결된 코드는
대기권 밖인지도 모른다.
몇 번의 뒤척임으로 사내는 온몸에
잠을 골고루 바른다.
신선하고 맑은 힘이 온몸으로 퍼진다.
지지직거리는 몇 마디의 잠꼬대가 몸 밖으로 버려지고
꿈과 꿈들 사이에 부드럽고 말랑한 연골이 채워진다.
피로와 힘겨움 같은 것들을 밤새 먹어치우는 거대한 짐승,
결국, 저 사내도 언젠가는 저 침대의 먹이가 될 것이다.
간혹, 삐걱이며 새어나오는 전류
버려진 꿈들의 폐기장
산더미처럼 쌓인 저 권태와 피곤함이 배어 있는 덩어리,
점점 충전 속도가 떨어져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저 사내
어쩔 수 없이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저 사내.
[감상]
침대를 <낡은 충전기>로 보는 탁월한 시적상상력이 시선을 끄는 시입니다. 더욱이 충전기로 보내는 에너지 코드를 <몇억 광년>으로 확장시킴으로서, 일상적인 <잠>의 의미를 생명의 기원까지 내다보게 합니다. 온몸에 잠을 골고루 바른다거나 잠꼬대가 몸 밖으로 버려지는 행위에서 알 수 있듯, 대상의 물성(物性)을 꿰뚫어 그 형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도 낯설면서 새로운 이 시의 묘미입니다. 등단 8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인 만큼 편편마다 단단한 공력이 뭉쳐 두툼한 시집입니다.
그 짧은 비명의 '울림'이 이렇게 강하게 퍼짐에 새삼 '시(인)의 정신'에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매 행마다 느껴지는 '비유'의 힘에 고개를 절로 끄덕이며, 즐감하고 갑니다. 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