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 박미라/ 《현대시시인선》(2004)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코피를 쏟았다
검붉은 꽃잎이 수북이 쌓인다
꽃잎으로 위장한 편지
핏빛 선명한 이 흘림체의 편지를
나는 읽어낼 수 없다
행간도 없이 써 내려간 숨 막히는 밀서를
천천히 짚어간다
꽃잎 뭉개지는 비릿한 냄새 온 몸에 스멀댄다
기억의 냄새만으로도
노을이 타오르고 맨드라미 자지러지는 저녁을
맨발의 내가 엎어지며 간다
이 편지의 수취인은 내가 아니다
녹슨 우체통 속에서 늙어가는
뜯지 않은 편지를
먼지 자욱한 세상의 뒤쪽으로 반송한다
젖은 꽃잎을 떼어 빈 봉투에 붙인다
어딘가의 주소를 적는다
여기는 백만 년 후의 무덤이라고 쓴다
집 잃은 아이처럼 헤매는 비린내를 거두어 담는다
붉은 글자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는다
받는 이의 주소를 적는다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마음에게 라고 쓴다
백만 년 전에도 마음이었던 그대
여기, 지워진 행간을 동봉한다
[감상]
인간의 혈액 속에는 DNA 등 많은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그 정보들은 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생명의 진화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시는 어느 날 문득 코피를 쏟는 모습에서 놀랍게도 <편지>를 발견합니다. 코에서 꽃잎처럼 뚝뚝 떨어지는 피가 과거 어딘가에서 보내온 편지라는 것이지요. 기실 지름 1mm의 작은 핏방울 하나에 백혈구 7천 개, 혈소판 50만 개, 적혈구 500만 개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작고 미세한 것을 과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면서 요즘은 우주의 발견을 혈액 속 질서와 연관 짓기도 합니다. 태아가 자궁에서 혈액을 공급받듯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따라 혈액의 근원을 쫓아 올라가다보면 <백만 년 전에도 마음이었던 그대>를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시에서 <이 편지의 수취인은 내가 아니다>라는 점은 화자 또한 <편지>의 전달 과정이며, 아득히 먼 후대로 자손을 따라 피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편지는 얼마나 <숨 막히는 밀서>입니까.
코피가 떨어지면서 아름다운 노을이 되고
붉은 맨드라미 꽃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톡, 톡,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아프게 눌러쓴 흘림체의 글씨가 보입니다
편지를 쓰는 동안, 젖은 기억이 되살아나고
추억은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꽃잎으로 떨어진 비릿한 냄새,
오랫동안 뜯지 않았던 편지를 몸에 담아놓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래 전, 슬퍼서 너무나 아파서
한쪽으로 옮겨 놓았던 편지를 다시 읽어봅니다
집 잃은 아이처럼
내 몸에서 방황하는 기억의 한 부분을 떼어
꽃잎으로 포장해도 역시 기억은 비릿합니다
다시 몸에게 편지를 반송합니다
그 편지는 백만 년 전에도 썼고 지금도 쓰고 있지만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녹슨 우체통 속에서 늙어가는 뜯지 않은
저 붉은 맨드라미 꽃잎으로 쓴 흘림체의 편지를 그 사람에게 보냅니다
그는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