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김경주/ 《문예중앙시인선》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감상]
가령 그런 시집이 있지요. 한 장 한 장 넘기면서도 뒤로 넘기는 것이 아까워 아껴서 읽어야겠구나 싶은 시집. 이 시집은 활자에 들어서는 순간 경험하지 못한 어떤 질서로 충만합니다. 신비스러울 정도로 운용되는 직관을 보고 있노라면 <참혹하고 황홀하다>라는 모 시인의 감상이 끄덕여집니다. 박혀 있는 못에 대해 시인은 벽의 뒤편과 시간의 흐름, 삶의 공간까지 투시하면서 소재를 자유롭게 배치해놓습니다. 외로움이라든가 고독이라든가 저 깊은 마음의 심연에서 치열하게 발산되는 미증유의 정신은 독특한 자장으로 독자를 사로잡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울음이란 감정이 제어하지 못한 다른 나의 목소리이어서, 어쩌면 제 안에 기르는 짐승의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후련하게 울고 나면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령 이런 시집이 그렇습니다.
이 시집을 읽으며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시는 신비스럽습니다 특히 이 부분이...좋네요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깊어가는 못은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빨간 거미 한마리 입 밖으로 기어나올 때까지
그렇게 밤에 몰래 못은 휜다는 것
사람은 울면서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 되고
그 짐승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
이 시를 읽노라면, 여관방의 못처럼 작은 틈새로 못이 흔들립니다
내 안의 짐승이 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