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구부러진 길 저쪽 - 배용제

2001.04.06 11:52

윤성택 조회 수:1939 추천:296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 민음의시 86




구부러진 길 저쪽


그녀는 그 고장 사람이 아니었다
몇 해 전 읍의 외곽 구부러진 길을 통하여 이곳에 왔다
망토처럼 걸친 옷차림, 전혀 다른 내용이 씌어진
서적의 표지처럼 낯설고 거추장스러웠지만,
들춰보면 어디서 내용을 빠트렸는지 아무것도 없는 빈 백지뿐이었다
어느 고장이든 이런 소품은 있는 거라고
한적한 읍내 풍경에 심심찮게 진열되곤 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웃음을 게워냈다
몸속엔 웃음 외 무엇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웃음을 전파하러 온 순례자처럼
온종일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어느새 아이들은
그녀의 신도가 되어 뒤따르며 곧잘 흉내를 냈다
흰 습자지 같은 웃음은, 그러나 깃발처럼 흔들리며
창백한 한낮을 배회했다
착한 사람들은 동정 따위를 들고 모여들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제각기 지난날의 신분에 대해 추측하면서
백지의 내용을 읽었노라고 우겨댔다
부풀려진 소문이 그녀를 낙서장으로 사용했다
밤이 되어 길 저쪽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언제나 마지막 이별을 했다
누구나 한 번은 구부러진 길을 통과한다는 사실에 대해,
그 경험의 충격들을 용서하듯이 한참을 우두커니 웃고 있었다
어느 날 그 하얀 웃음이 차에 치여 나뒹굴었다
그녀는 히죽이며, 또는 헐떡이며
거센 충격을 흡수하면서 끝까지 웃음을 게워냈다
웃음을 전파하다 사라지는 순교자처럼,
최후의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찢어진 가죽 부대처럼
여기저기서 붉은 웃음이 주룩주룩 한꺼번에 부어졌다
구부러진 길 저쪽으로 사람들이 다시 흩어지고 있었다.




[감상]
배용제 시인의 이름을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발견하기 시작한 때는 95년도 정도부터였던 것 같다. 97년 동아일보에 당선되기 전, 한 해에 중앙지 신춘문예 최종심에 2-3곳은 올랐던 그였다. 대체 어떤 시를 썼기에 그의 시가 번번이 복권당첨과도 같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던 것일까 적잖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견디었기 때문일까. 그의 예순여섯 편의 두툼한 시들을 펼쳐 읽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고 권태로운 그의 시편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죽음의 향기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래 전부터 잔류되어온 화두이기에 그의 시는 오히려 친근감까지 들었다. 또한 生은 지리멸렬하고 세상은 더욱 혼탁하게만 여겼던 그 당시 나의 관념에서도 치명적인 울림이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11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10 카페 리치에서 - 곽윤석 [3] 2001.07.18 1570 304
1109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2001.07.19 1574 291
1108 온라인 - 이복희 2001.07.20 1361 306
1107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2001.07.23 1323 302
1106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00 268
1105 낡은 의자 - 김기택 [1] 2001.07.30 1574 248
1104 나는 시간을 만든다 - 박상순 2001.07.31 1437 255
1103 기차는 간다 - 허수경 [2] 2001.08.01 1568 236
1102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 - 이솔 2001.08.02 1359 242
1101 울고 있는 아이 - 배용제 2001.08.03 1494 254
110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2001.08.04 1241 245
1099 소주 - 최영철 2001.08.06 1556 240
1098 섬 - 조영민 [6] 2001.08.07 2047 256
1097 무인 통신 - 김행숙 2001.08.08 1425 262
1096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1 271
1095 Y를 위하여 - 최승자 2001.08.10 1701 265
1094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2001.08.13 1762 235
1093 어느 날 문득 - 김규린 2001.08.14 1779 232
1092 내 마음의 풍차 - 진수미 2001.08.16 1717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