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왕십리 - 권혁웅

2001.04.10 14:08

윤성택 조회 수:1842 추천:292

* 현대시 동인상 수상작/ 권혁웅

왕십리



새로 두 시에 산등성이를 건너온 비는
내 방 창을 두드린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었다
먼 데 있는 것들이 문득 소식을 전하는 때가 있다
지나쳐온 것들이 중국집 스티커나 세금 고지서처럼
문 앞에 부려져 있을 때
그걸 묵은 신문지와 함께 버릴 수 있나?
웃기고 있네. 나는 科金別納처럼 살았어
내 자리 어디선가 조금씩 내가 빠져나간 거지
세 시가 되니 비는 더 심해져서
파도치는 소리를 낸다 창문을 여니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
구름 뒤에 둥글게 빛나는 달이 있듯이
저곳 어디에 왕십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外道가 지나쳤다,라고 木月은 말했지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길 너머에 있었다
새로 세시에서 네 시로 지나가는 저 비처럼
나는 세상을 건너갈 수 없었다
왕십리, 십리가 멀다 하고 찾아갔던 곳
하지만 늘 십리는 더 가야 하던 곳
내게도 밤을 디디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몰론 왕십리에 가기 전에, 왕십리도 못 가서
나는 發病이 날지도 모르지만


[감상]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참 잘 다듬어진 시입니다. 처음 목격된 것에서부터, 자신의 의식으로 점진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묘한 흡입이라고 봅니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다든지,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처럼 낯설지만 신선한 표현력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왕십리, 그 십리가 내 생의 전부였다니.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71 캣츠아이 13 - 노혜경 2001.09.18 1298 224
1070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이원 [1] 2001.09.19 1434 201
1069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 송찬호 2001.09.20 1228 189
1068 품을 줄이게 - 김춘수 2001.09.21 1196 187
1067 헌 돈이 부푸는 이유 - 채향옥 [1] 2001.09.22 1318 189
1066 거리에서 - 박정대 2001.09.24 1557 196
1065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2001.09.25 1627 206
1064 정동진 - 이창호 2001.09.26 1511 224
1063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062 장지 - 박판식 2001.10.09 1448 247
1061 聖 - 황학주 2001.10.18 1310 250
1060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갈까 - 김경진 2001.10.19 2026 202
1059 나무기저귀 - 이정록 2001.10.23 1204 203
1058 반지 - 박상수 2001.10.26 1425 191
1057 태양과의 통화 - 이수명 [2] 2001.10.29 1304 206
1056 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2001.10.31 1703 212
1055 경계1 - 문정영 2001.11.02 1164 181
1054 12월의 숲 - 황지우 [3] 2001.11.07 1598 203
1053 미탄에서 영월사이 - 박세현 2001.11.08 1099 188
1052 손전등을 든 풍경 - 박경원 2001.11.14 1184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