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시 동인상 수상작/ 권혁웅
왕십리
새로 두 시에 산등성이를 건너온 비는
내 방 창을 두드린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었다
먼 데 있는 것들이 문득 소식을 전하는 때가 있다
지나쳐온 것들이 중국집 스티커나 세금 고지서처럼
문 앞에 부려져 있을 때
그걸 묵은 신문지와 함께 버릴 수 있나?
웃기고 있네. 나는 科金別納처럼 살았어
내 자리 어디선가 조금씩 내가 빠져나간 거지
세 시가 되니 비는 더 심해져서
파도치는 소리를 낸다 창문을 여니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
구름 뒤에 둥글게 빛나는 달이 있듯이
저곳 어디에 왕십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外道가 지나쳤다,라고 木月은 말했지만
아니다, 나는 처음부터 저 길 너머에 있었다
새로 세시에서 네 시로 지나가는 저 비처럼
나는 세상을 건너갈 수 없었다
왕십리, 십리가 멀다 하고 찾아갔던 곳
하지만 늘 십리는 더 가야 하던 곳
내게도 밤을 디디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몰론 왕십리에 가기 전에, 왕십리도 못 가서
나는 發病이 날지도 모르지만
[감상]
현실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참 잘 다듬어진 시입니다. 처음 목격된 것에서부터, 자신의 의식으로 점진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묘한 흡입이라고 봅니다. '창문에/ 조팝나무 잎이 우표처럼 붙어 있'다든지, '먼 데 불빛이 어렵게 깜박인다/ 누군가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지'처럼 낯설지만 신선한 표현력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왕십리, 그 십리가 내 생의 전부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