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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 김선우

2001.04.17 10:34

윤성택 조회 수:2253 추천:324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김선우 / 창작과비평사 2001




간이역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감상]
어릴 적 우리집이 있던 곳 근처에는 기차길이 있었고 소시장이 있었습니다. 닷새마다 열리던 대천 3·8장이 서던 날이면, 어디선가 연신 실어져 오는 소들의 울음소리. 그애는 그 시장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도란도란"이라는 요정집 딸이었습니다. 혼자서 흙장난을 하고 놀고 있으면 어느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뚱한 표정으로 "나랑 놀자." 하곤 했습니다. 장항선 기차가 지날 때면 그 소리 들리지 않아 "뭐라구?" 옹송그린 어깨를 들썩였었습니다. 그애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기차길 너머 둘이서 한없이 바다에 가보자고 걸어보기도 했던 분홍색 반바지와 하얀 스타킹의 그애. 김선우 시인이 떠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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