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낡은 의자 - 김기택

2001.07.30 16:01

윤성택 조회 수:1574 추천:248

『사무원』 / 김기택 / 창작과비평사



        낡은 의자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잠시 후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번 넘어졌지만
        한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감상]
모든 사물은 시인의 눈을 통하면,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기도 합니다. 낡은 의자에 투영된 시인의 마음은 안쓰러움과 함께, 의자의 운명을 꿰뚫고 있습니다. 어쩌면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의자를 통해, 보여주는 건지도 모릅니다. 늘 언제나 묵묵히 무게를 견뎌내던 내 의자도 어느 때부턴가 삐걱이기 시작한 것은, 시간을 버티고 서 있기에 외로웠기 때문은 아닐까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71 캣츠아이 13 - 노혜경 2001.09.18 1298 224
1070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이원 [1] 2001.09.19 1434 201
1069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 송찬호 2001.09.20 1228 189
1068 품을 줄이게 - 김춘수 2001.09.21 1196 187
1067 헌 돈이 부푸는 이유 - 채향옥 [1] 2001.09.22 1318 189
1066 거리에서 - 박정대 2001.09.24 1557 196
1065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2001.09.25 1627 206
1064 정동진 - 이창호 2001.09.26 1511 224
1063 가을산 - 안도현 2001.09.27 2815 286
1062 장지 - 박판식 2001.10.09 1448 247
1061 聖 - 황학주 2001.10.18 1310 250
1060 어떤 그리움을 타고 너에게로 갈까 - 김경진 2001.10.19 2026 202
1059 나무기저귀 - 이정록 2001.10.23 1204 203
1058 반지 - 박상수 2001.10.26 1425 191
1057 태양과의 통화 - 이수명 [2] 2001.10.29 1304 206
1056 죽도록 사랑해서 - 김승희 2001.10.31 1703 212
1055 경계1 - 문정영 2001.11.02 1164 181
1054 12월의 숲 - 황지우 [3] 2001.11.07 1598 203
1053 미탄에서 영월사이 - 박세현 2001.11.08 1099 188
1052 손전등을 든 풍경 - 박경원 2001.11.14 1184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