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선풍기 - 조정

2005.01.25 14:17

윤성택 조회 수:1807 추천:178

<선풍기> / 조정/ 《시향》2004년 겨울호 (지난 계절의 시 다시보기 中)


        선풍기

        T자로(字路) 끝
        좌회전 혹은 우회전 뿐인 길에 빨간 불이 켜진다
        브레이크르 누르는 우익에 침이 고인다
        죽은 산을 지고 사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나는 시종 왼쪽이 무거웠다

        수리비가 더 나가게 생긴 선풍기를 수리해야겠다

        사공이 물 위에 누워 별을 더듬는다
        불안한 점괘였다
        누가 우주를 슬쩍 흔들어 제 자리에 놓는 소리가 들렸다
        해일이 일었다
        풀뿌리가 힘을 다해 땅을 움켜쥐고 있던 날이었다
        새들은 마음과 눈과 귀가 부서져
        저런, 피 묻은 구름이 두 손을 적시었다
        선잠에 악몽이었다

        등이 끈끈한 선풍기가 꿈의 모가지를 잡고 찌그덕거린다

        아버지 불길한 저 산을 팽개치세요
        보리 싹이 꿩 발목까지 자란 이월 스무날 밤마다 돌아와
        제 몫의 젯밥을 먹고
        왼쪽으로 왼쪽으로 어둠에 밀려 행군해 가던
        그들이 좌회전 화살표를 장전했다
        내 이마를 조준했다
        산이 버티고 선 정면을 향해 나는 돌진해 버렸다

        방바닥을 구르며 쿨럭거리는 선풍기를 두고 밤 근무 나간다
        
[감상]
고장난 선풍기와 아버지의 삶을 대비시킨 비유가 강렬합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오른쪽이 마비된 풍으로 고생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산이셨던 아버지는, 죽은 반쪽을 지고 사셨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그런 아버지의 수발을 들었던 화자의 내면과 불길한 꿈의 형상이 인상적입니다. 또 그것을 통한 선풍기의 직관도 새롭고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51 11월 - 이성복 2001.11.15 1448 212
1050 거미 - 박성우 2001.11.26 1314 209
1049 따뜻한 슬픔 - 홍성란 2001.11.27 1641 190
1048 시간들의 종말 - 김윤배 2001.11.28 1146 202
1047 파문 - 권혁웅 2001.11.29 1251 196
1046 정신병원으로부터 온 편지 - 유종인 2001.11.30 1225 201
1045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5 207
1044 지하역 - 이기와 2001.12.04 1194 208
1043 빈집 - 박진성 2001.12.05 2285 196
1042 수면의 경계 - 성향숙 2001.12.10 1198 190
1041 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 - 김애란 2001.12.11 1258 186
1040 적멸 - 김명인 2001.12.12 1222 192
1039 너무 아름다운 병 - 함성호 2001.12.19 1634 217
1038 고수부지 - 유현숙 2001.12.20 1487 205
1037 방문객 - 마종기 2001.12.28 1202 199
1036 마른 아구 - 김 경 2002.01.02 1149 213
1035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2002.01.08 1144 203
1034 이사 - 원동우 2002.01.10 1197 205
1033 토끼가 달에 간 날 - 윤이나 2002.01.11 1400 211
1032 요약 - 이갑수 2002.01.12 1231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