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 이성복 (19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 2007년 《현대문학》 8월호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 나무인간 강판권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에는 그가 있는 줄을 몰랐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튼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옆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는 또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려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
나무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
[감상]
읽고 나서 자료를 좀 찾다보니 이 시의 묘미가 더 새롭군요. 기파랑은 신라 때 승려인 충담사가 지은 향가 찬기파랑가에서 추모되는 신라의 화랑입니다. 이 향가는 기파랑을 절개가 있고 물이나 대나무처럼 자연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인간 강판권>은 누구일까. 시의 흐름으로 보아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려/ 우리에게 온 나무>이거나 <나무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합니다만, 올 6월에 『나무열전』 책을 펴낸 저자이더군요.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추천글을 이성복 시인이 지금의 시와 동일하게 썼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추천글이 시가 된 상황인데, 행과 연을 나누고 괄호를 적절히 사용하니 산문과는 다르게 좀더 깊은 울림이 우러납니다. 제목에서처럼 앞으로 서정에 대한 연작시로 이어질 듯싶습니다. 『나무열전』추천글 마지막 부분을 옮겨 봅니다. <그가 이 책을 썼다. 나무에 대한, 나무로서의 자신에 대한 책, 언제나 조심스런 잎새에 가려 보이지 않던, 그의 곧은 줄기와 민감한 뿌리에 관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