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뒤란의 봄 - 박후기

2006.04.01 14:40

윤성택 조회 수:1820 추천:233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실천문학》(근간)


        뒤란의 봄

        그 해 가을,
        지구를 떠난 보이저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함석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처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군부대 격납고 지붕에서
        땅으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2호와
        나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

        봉분처럼
        깨진 바가지 위로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주인 잃은 삽 한 자루
        울타리에 기대어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고
        처마 밑 구석진 응달엔
        깨진 사발이며 허리 구부러진 숟가락
        토성(土星)의 고리를 닮은
        둥근 석유곤로 받침대가
        눈발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겨울의 뒤란에는
        버려진 것들이 군락을 이루며
        추억의 힘으로 자생하고 있었으니,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었다

        눈물이 담겨 얼어붙은 빈 술병 위로
        힘없이 굴뚝이 쓰러졌고
        때늦은 징집영장과 함께
        뒤란에도 봄이 찾아왔다

        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
        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
        나는 캄캄한 굴뚝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김승옥 소설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인용.


[감상]
<아버지>의 부재 속에 계절을 감각하고, 그것들과 함께 아득하게 흘러가는 세월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이를 체감하는 방식이 우주적 상상력과 결합되면서 서정의 공간이 더더욱 아득하게 확장되는군요. 이 시집의 시들은 누군가의 말처럼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슬픔의 무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고향이 미군주둔에 의해 상처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 그러하듯 현실의 핍진성 너머 진리와 소통하는 따뜻한 열망이 있을 것입니다. 시집 곳곳 제대로 된 서정시답게 조용하고 쓸쓸한 서정의 경지와, 시적 대상의 진지한 통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살가죽구두 - 손택수 2004.04.19 1069 176
1030 여주인공 - 이희중 2002.02.16 1070 173
1029 찰나의 화석 - 윤병무 [1] 2002.11.13 1070 168
1028 다비식 - 신용목 2002.09.13 1071 219
1027 폭설 - 박이화 2003.01.08 1072 172
1026 정류하다 - 조동범 2003.10.24 1072 170
1025 스피드 사랑법 - 안차애 2002.11.01 1073 185
1024 가스관 묻힌 사거리 - 최승철 2002.07.02 1075 186
1023 오래된 약 - 백인덕 2003.08.26 1075 166
1022 정비공장 장미꽃 - 엄재국 2004.11.01 1075 183
1021 그곳 - 이상국 2002.11.27 1076 216
1020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 김승원 [1] 2002.12.11 1076 197
1019 싸움하는 사람을 보다 - 박진성 2002.11.21 1077 178
1018 밤의 편의점 - 권지숙 2011.01.20 1077 99
1017 배꼽 - 이민하 2002.12.02 1078 191
1016 고가도로 아래 - 김언 2003.07.09 1079 221
1015 오래된 가구 - 마경덕 2003.03.10 1080 200
1014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 한용국 2004.06.21 1080 188
1013 서치라이트 - 김현서 [2] 2007.03.13 1080 168
1012 건조대 - 최리을 2002.03.25 1081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