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박후기/ 《실천문학》(근간)
뒤란의 봄
그 해 가을,
지구를 떠난 보이저2호가
해왕성을 스쳐 지나갈 무렵
아버지가 죽었다
이제 우리 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힘센 것은 모두
우리 집의 밖에 있다*
함석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처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군부대 격납고 지붕에서
땅으로 내리꽂힌 아버지가
멀어져 가는 보이저2호와
나와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겨울이 왔고
뒤란에 눈이 내렸다
봉분처럼
깨진 바가지 위로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주인 잃은 삽 한 자루
울타리에 기대어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고
처마 밑 구석진 응달엔
깨진 사발이며 허리 구부러진 숟가락
토성(土星)의 고리를 닮은
둥근 석유곤로 받침대가
눈발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겨울의 뒤란에는
버려진 것들이 군락을 이루며
추억의 힘으로 자생하고 있었으니,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었다
눈물이 담겨 얼어붙은 빈 술병 위로
힘없이 굴뚝이 쓰러졌고
때늦은 징집영장과 함께
뒤란에도 봄이 찾아왔다
울타리 아래 버려진 자루 속에서
썩은 감자들은 싹을 틔웠고
나는 캄캄한 굴뚝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김승옥 소설 ‘염소는 힘이 세다’에서 인용.
[감상]
<아버지>의 부재 속에 계절을 감각하고, 그것들과 함께 아득하게 흘러가는 세월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이를 체감하는 방식이 우주적 상상력과 결합되면서 서정의 공간이 더더욱 아득하게 확장되는군요. 이 시집의 시들은 누군가의 말처럼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슬픔의 무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고향이 미군주둔에 의해 상처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하면, <뒤란은/ 낡거나 상처받은 것들의/ 아늑한 정원>이 그러하듯 현실의 핍진성 너머 진리와 소통하는 따뜻한 열망이 있을 것입니다. 시집 곳곳 제대로 된 서정시답게 조용하고 쓸쓸한 서정의 경지와, 시적 대상의 진지한 통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조그만 읍내 서점에
주문전화 한 통 넣어야겠습니다.
사고 싶은 시집이 하나 생겼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