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 / 안현미/ 《문예중앙 시인선》
총잡이들의 세계사
세상은 흙먼지 날리는 무법천지의 서부와도 같다고 아
이가 말했을 때 나는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마네킹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아이의 염색한 머리 색깔과 마
네킹의 머리 색깔이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피나 콜라다
빛 머리 색깔, 이방인처럼 낯선 아이의 말풍선 속에서는
욜라 짱나 담탱이 같은 해체된 모국어가 쉴 새 없이 튀어
나오고 구겨진 교복엔 기름때가 얼룩져 있다 지구의 반대
편에선 검은 오일 때문에 유혈 전쟁이 한창이지만 검은
오일이 장전된 총을 들고 짙은 선탠이 된 자동차 뒤꽁무
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아이의 총에선 불꽃이 일지
않는다 선탠이 된 차창이 스르르 열리고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가 골드카드에 사인을 할 때 아이는 서부의 총잡이
존 웨인이 되어 조수석 짙은 화장을 하고 마네킹처럼 앉아
있는 제 또래의 여자아이를 구출하는 상상을 한다 다행히
그건 이 도시에서 무시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아이는 제 총
을 가발 쓴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통에 들이밀지 않고 만국
기가 펄럭이는 주유소 앞 바보 같은 허풍선이 거인 풍선
인형만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다
[감상]
주유소에 가면 주유아르바이트생이 있지요. 이 시는 그 아이들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 등을 <무법천지의 서부>와 비유해 풀어냅니다. 염색의 <머리 색깔>과 <해체된 모국어>는 어쩌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릅니다. 언제 불붙을지 모를 주유 방아쇠를 당기는 불안한 청춘이지만, 원조교제 여자아이의 구출을 상상하듯 마음 속 정의만은 살아 있습니다. 치밀한 묘사와 <거인 풍선>으로 치닫는 의미가 인상적입니다. 전체적으로 톡톡 튀는 사이다 맛 시집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