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 이승희/ 《창비》
사랑은
스며드는 거라잖아.
나무뿌리로, 잎사귀로, 그리하여 기진맥진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마른 입맞춤.
그게 아니면
속으로만 꽃 피는 무화과처럼
당신 몸속으로 오래도록 저물어가는 일.
그것도 아니면
꽃잎 위에 새겨진 무늬를 따라 꽃잎의 아랫입술을 열고 온몸을 부드럽게 집어넣는 일.
그리하여 당신 가슴이
안쪽으로부터 데워지길 기다려 당신의 푸르렀던 한 생애를 낱낱이 기억하는 일.
또 그것도 아니라면
알전구 방방마다 피워놓고
팔베개에 당신을 누이고 그 푸른 이마를 만져보는 일.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라고?
사랑한다는 건 서로를 먹는 일이야
뾰족한 돌과 반달 모양의 뼈로 만든 칼 하나를
당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놓는 일이지
붉고 깊게 파인 눈으로
당신을 삼키는 일.
그리하여 다시 당신을 낳는 일이지.
[감상]
세상에 대한 적의로 가득한 시가 있는 반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되비춰 보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이렇듯 <사랑>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 삶의 순간순간에서 길어 올리는 직관이 빼어납니다. 간결하고 암시적인 은유의 묘미랄까요. <당신>과 감응하고 교감하는 행들을 쫓다보면 부드러운 결을 가진 서정에 매혹되고 맙니다. 등단 후 8년 동안 대부분의 시가 발표되지 않고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있었던 까닭에 더 와닿는 시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