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001.04.10 10:18

윤성택 조회 수:1801 추천:283

비단길/ 강연호/ 세계사




제기동 블루스·1



이깐 어둠쯤이야 돌멩이 몇 개로
후익 갈라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막한
날들이 제기천 썩은 물처럼 고일 때마다
내가 야심껏 던져 넣은 돌멩이들은
지금 어느만큼의 동그라미를 물결 속에 키웠는지
헛된 헤아림 헛된 취기 못 이겨
걸음마다 물음표를 찍곤 하던 귀가길
자취방 문을 열면 저도 역시 혼자라고
툴툴거리다가 지친 식빵 조각이
흩어진 머리칼과 함께 씹히곤 하였다
제기동,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하숙과
자취에 익숙했던 한양 유학 동기생들은
이미 모두 떠났지만 도무지 건방졌던 수업시대
못난 반성 때문인지 졸업 후에도 나는
마냥 죽치고 있었다 비듬 같은 페퍼포그와
도서관 늦은 불빛도 그리워하다 보면
이깐 어둠쯤이야 싶었던 객기보다
시대의 아픔이란 게 다만 지리멸렬했다
그런그런 자책과 앨범뿐인 이삿짐을 꾸려
어디로든 떠나자고 다짐했을 때
그동안 키운 야심의 동그라미들 흔적 없는
제기천 흐린 물결 속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던져 넣은 건
채 부벼 끄지 못한 담뱃불이 고작이었다


[감상]
강연호 시인의 이 시집은 습작시절 옆구리에 항상 끼고 다녔던 시집입니다. 이 시인의 시집에서는 '비유'에 관한 엄청난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보기와도 같아서, 비유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일깨워주곤 했습니다. 이 시는 대학시절 제기동에서의 무력한 청춘을참 쓸쓸하게 그려냅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던져 넣은 건/ 채 부벼 끄지 못한 담뱃불이 고작이었다 '에서 알 수 있듯 자기 진술로 일관하던 정적인 분위기에서 동적인 분위기로 반전시키는 솜씨가 백미입니다. 그 담뱃불의 파문이, 이 시의 다음 시집의 화두가 되었을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51 가방, 혹은 여자 - 마경덕 [2] 2005.12.10 1785 217
150 벽 - 유문호 [1] 2006.04.25 1786 219
149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1] 2011.02.11 1789 128
148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1] 2006.08.17 1791 196
147 아직은 꽃 피울 때 - 하정임 2004.08.19 1792 197
146 첫사랑 - 진은영 [2] 2001.09.11 1794 190
145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2001.12.03 1795 207
»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2] 2001.04.10 1801 283
143 민들레 - 이윤학 2001.06.13 1803 285
142 선풍기 - 조정 [1] 2005.01.25 1807 178
141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40 뒤란의 봄 - 박후기 [1] 2006.04.01 1820 233
139 오늘 당신을 만난 데자뷰 - 박선경 2006.01.11 1824 255
138 남해 유자를 주무르면 - 김영남 2011.04.06 1824 160
137 저무는 풍경 - 박이화 [1] 2006.05.02 1825 208
136 아침의 시작 - 강 정 [1] 2007.04.17 1825 164
135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1] 2001.05.02 1826 278
134 별이 빛나는 밤에 - 장만호 2008.11.26 1829 128
133 당신은 - 김언 [1] 2008.05.26 1837 162
132 사랑니 - 고두현 [1] 2001.07.11 1841 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