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겨울 모스크바 편지 - 김성대

2011.02.11 12:52

윤성택 조회 수:1789 추천:128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김성대 (2005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 《민음의 시》170

          겨울 모스크바 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눈 덮인 벌판에 서 있었다
        
        겨울에 대한 끊임없는 여백
        읽을 때마다 다른 곳에 있는 문장들
        욕조에 물을 받듯이 그것을 옮겨 적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기침과 침묵에 대해 쓰면 얼음이 되어 닿았다
        묘지에서 돌아오는 저녁 입김에 대해 쓰면
        얼음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되어 닿았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긴 복도에 서 있었다

        우리말은 다 잊은 것인지
        우리는 여백을 헤매고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를 빠져나가는 공기에 대해 쓰면
        창의 뒷면이 되어 닿았고
        창에 입김을 불어도 글자가 쓰여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을 문장들
        겨울에 대한 장문의 여백

        여백을 고쳐 쓰면서도 우리의 문장은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감상]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진 편지를 받아보았거나 보낸 적이 언제였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편지는 어느새 우리의 일상에서 인쇄체의 것들로 달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데 편지를 쓸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우리의 마음속 물결무늬 소인과 함께 아직도 존재합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때의 감정 느낌들은 고스란히 이 겨울의 풍경에서 불러낼 수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의 골몰한 마음이 여백을 채워가지만, 그 편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이해되고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쓸쓸함이 이곳에 깃들어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31 왕십리 - 권혁웅 [1] 2001.04.10 1842 292
130 삼십대 - 심보선 [1] 2008.05.27 1842 175
129 책 읽는 여자 - 김희업 2005.09.14 1843 208
128 옥상 - 정병근 [3] 2005.11.03 1847 227
127 오존 주의보 2 - 문정영 [1] 2001.04.07 1848 299
126 뺨 - 함순례 [2] 2006.07.25 1854 225
125 인생 - 박용하 [2] 2003.10.10 1857 159
124 안녕, UFO - 박선경 2006.05.25 1859 267
123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 박미라 [2] 2006.08.26 1864 210
122 여자들 - 김유선 2001.04.21 1865 291
121 소나무 - 마경덕 [1] 2005.01.19 1867 201
120 죄책감 - 신기섭 2006.05.29 1871 243
119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8 아득한 봄 - 천수호 2006.07.01 1876 223
117 울고 있는 사내 - 장만호 2006.07.31 1879 229
116 정기구독 목록 - 최갑수 [1] 2001.04.10 1880 280
115 책들 - 강해림 2006.07.07 1882 249
114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3 첫사랑 - 하재봉 2001.07.09 1892 306
112 집으로 가는 길 - 김선주 [1] 2004.08.29 1892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