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피할 수 없는 길 - 심보선

2011.02.14 15:01

윤성택 조회 수:1756 추천:134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1994년 『조선일보』로 등단) / 《문학과지성시인선》346

          피할 수 없는 길

        이 길은 어제도 지나갔던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과만 마주칠 수 있다
        수치심 때문에
        그는 양쪽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덮어놓는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
        말해질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다
        수치심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과 얼굴을 바꿔놓는다
        그러나 왜 말해질 수 없는 일은
        말해야 하는 일과 무관한가, 왜
        규칙은 사건화되지 않는가
        이 길은 쉽게 기억된다
        가로수들은 단 한 번 만에
        나뭇잎을 떨구는 데 성공한다
        수치심을 잊기 위해
        그는 가끔 노래도 하고
        박수도 친다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 없다
        

[감상]
혼자 산책을 할 때면 내내 여러 생각과 함께 길을 걷습니다. 오직 한 사람, 나 자신에 관해서 말입니다. 걸으면서 반성을 하거나 자책을 할 때면 가끔 혼잣말도 하기도 합니다. 세상일들이 그러하듯 살다보면 실수도 하게 되어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산책이 가져다주는 ‘말해질 수 없는 일’의 사색을 형상화합니다. 나뭇잎이 낙하를 성공하듯, 마음을 다지면서 수치심을 떨구면서 그렇게 노래도, 박수도 치면서 우리는 산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살가죽구두 - 손택수 2004.04.19 1069 176
1030 여주인공 - 이희중 2002.02.16 1070 173
1029 찰나의 화석 - 윤병무 [1] 2002.11.13 1070 168
1028 다비식 - 신용목 2002.09.13 1071 219
1027 폭설 - 박이화 2003.01.08 1072 172
1026 정류하다 - 조동범 2003.10.24 1072 170
1025 스피드 사랑법 - 안차애 2002.11.01 1073 185
1024 가스관 묻힌 사거리 - 최승철 2002.07.02 1075 186
1023 오래된 약 - 백인덕 2003.08.26 1075 166
1022 정비공장 장미꽃 - 엄재국 2004.11.01 1075 183
1021 그곳 - 이상국 2002.11.27 1076 216
1020 거미의 길은 젖어 있다 - 김승원 [1] 2002.12.11 1076 197
1019 싸움하는 사람을 보다 - 박진성 2002.11.21 1077 178
1018 밤의 편의점 - 권지숙 2011.01.20 1077 99
1017 배꼽 - 이민하 2002.12.02 1078 191
1016 고가도로 아래 - 김언 2003.07.09 1079 221
1015 오래된 가구 - 마경덕 2003.03.10 1080 200
1014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 한용국 2004.06.21 1080 188
1013 서치라이트 - 김현서 [2] 2007.03.13 1080 168
1012 건조대 - 최리을 2002.03.25 1081 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