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1994년 『조선일보』로 등단) / 《문학과지성시인선》346
피할 수 없는 길
이 길은 어제도 지나갔던 길이다
이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오직 한 사람과만 마주칠 수 있다
수치심 때문에
그는 양쪽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덮어놓는다
그러나 이 길 위에서
말해질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있다
수치심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과 얼굴을 바꿔놓는다
그러나 왜 말해질 수 없는 일은
말해야 하는 일과 무관한가, 왜
규칙은 사건화되지 않는가
이 길은 쉽게 기억된다
가로수들은 단 한 번 만에
나뭇잎을 떨구는 데 성공한다
수치심을 잊기 위해
그는 가끔 노래도 하고
박수도 친다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건넬 수 없다
[감상]
혼자 산책을 할 때면 내내 여러 생각과 함께 길을 걷습니다. 오직 한 사람, 나 자신에 관해서 말입니다. 걸으면서 반성을 하거나 자책을 할 때면 가끔 혼잣말도 하기도 합니다. 세상일들이 그러하듯 살다보면 실수도 하게 되어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시는 이렇게 산책이 가져다주는 ‘말해질 수 없는 일’의 사색을 형상화합니다. 나뭇잎이 낙하를 성공하듯, 마음을 다지면서 수치심을 떨구면서 그렇게 노래도, 박수도 치면서 우리는 산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