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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링 - 권오영

2020.04.23 20:20

윤성택 조회 수:174



너무 빠른 질문/ 권오영 (2008시와반시로 등단/ 천년의시작, 2016

 

마블링

 

 

나는 기름이다 아니다 물이다 아니다 종이다

 

찰박찰박 어머니의 양수 속 늙은 아기

참으로 긴 꿈속에서 나는 빨리 자랐다

힘껏 빨아들인 어머니가 내 속에서 자라기 시작한 오월, 피고 지는 꽃밭

 

나는 정원도 아니고 울타리도 아니다

뿌리박고 서 있는 나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림자에는 뿌리가 없다

 

그러니까나는나무가아니다꽃이아니다이파리가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고여 있었으며

백 마리의 오리가 차가운 세계를 흔들어놓도록 내버려두었고

꽃잎들 수북수북 썩도록 내버려두었으며 아주 드물게

눈 내리면 바닥이 갈라져 드러나도록 물고기들 날뛰게 했다

 

사흘 밤낮 비 내리면

출렁이는 나는 끔찍하게 소녀를 익사시키는 동안

흔들림 없이 평정을 이루고 침묵하는 법을 스스로 익혔으니

내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검은 연못

 

어둠의 정신이 또렷하다

너무 오랫동안 보아온 얼굴과 연못 속 얼굴이 분리된다

나를 빨아들인 나는 단정함 조용함 은밀함 서늘함

삼켜버리는 단아함

 

친절한 꿈속, 나는 온다

 

 

[감상]

마블링marbling은 물 위에 유성 물감을 떨어뜨려 저은 다음 종이를 덮어 묻어나게 하는 미술기법이다. 시인은 각 질료가 하나의 완성물로 도달하기 이전의 상태에 주목한다. ‘아니다의 부정 어법은 그 진술방식에 의해 생생한 읊조림으로 와닿는다. 이러한 이미지는 리듬으로 이어져 진실을 획득하기 위한 욕망으로 거침없이 흘러간다. 이때 상상력이 빚은 환상은 늙은 아기의 경이로운 형태로 창조된다. 이것은 마치 주술처럼 정원의 나무와 맞닥뜨리며 원초적인 생명으로의 반응이다. 이곳에서는 소녀의 익사조차 가변적인 의미일 뿐이다. 오히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광기로 잠식하는 존재성의 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마블링이라는 기법이 그러하듯 세계와 몸의 겹침 속에서는 복제와 비이성이 번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각기 다른 요소들이 일체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 그 근저에는 변화라는 욕망이 자리해 있다. 마블링이 물감의 실체를 떠내는 기법인 것처럼 시인은 언어를 통해 실재와 추상을 덧대며 존재와 본질을 찾기 위해 친절한 꿈속, 나는 온다고 또렷하게 어둠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감각이 일상에 스며 삶의 국면을 체험해 내는 것이다. 여기서 경험의 주체인 의 개입은 타자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걷어내며, 성찰을 견인하는 작용으로 자리한다. 그러므로 시 속에서의 는 운명의 형식으로 구체화된다. 스스로를 전면에 드러내며 시에 기투企投하는 자세, 이것은 시인만의 고뇌에 찬 결단이기도 하다. 실존이 순간에 머물면서 다양한 감각으로 계측되는 이 방식은 세계를 온몸으로 교감하는 숙명을 어쩌지 못한다. 감각의 극한점에서 사물을 그 경계에 가두고 시인은 처절하게 살아남아야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시간 속으로 들어서면 사이가 나타난다. 그 안에서는 나와 당신 혹은, 사물이 틈을 유지하며 관계의 자장을 형성한다. 이곳의 시간은 상대적이면서 그 시간을 인식하는 사람을 중심에 세워두는 물리가 있다. 이처럼 시간의 기억이란 한 사람을 위한 새로운 시공간에서의 재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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