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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12:02

윤성택 조회 수:3492

 

벚꽃 나무 주소

 

박해람

 

벚꽃 나무의 고향은

저쪽 겨울이다

겉과 속의 모양이 서로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들이다

봄에 휘날리는 저 벚꽃 눈발도

겨울 내내 얼려 두었던 벚꽃 나무의

수취불명의 주소들이다

겨울 동안 이승에서 조용히 눈감는 벚꽃 나무

모든 주소를 꽁꽁 닫아 두고

흰빛으로 쌓였던 그동안의 주소들을 지금

저렇게 찢어 날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죽은 이의 앞으로 도착한

여러 통의 우편물을 들고

내가 이 봄날에 남아 하는 일이란

그저 펄펄 날리는 환한 날들에 취해

떨어져 내리는 저 봄날의 차편을 놓치는 것이다

 

벚꽃 나무와 그 꽃이 다른 객지를 떠돌 듯

몸과 마음도 사실 그 주소가 다르다

그러나 가끔 이 존재도 없이 설레는 마음이

나를 잠깐 환하게 하는 때

벚꽃이 피는 이 주소는 지금 봄날이다

 

 

* 박해람 시집 백리를 기다리는 말(민음사, 2015)

 

 

[읽기 메모]

한 겨울 앙상한 나무들은 비슷비슷하여 무슨 꽃나무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봄에 이르러 꽃잎을 보고서야 벚꽃나무임을 알아보곤 하지요. 이 시는 겨울과 봄 사이에 이르는 과정을 <우편>에서 포착해냅니다. 벚꽃의 입장에서 보면 벚나무는 배달되어야 할 주소이겠지요. 제 주소를 찾아 <펄펄 날리는 환한 날들>로 피는 벚꽃, 그러니 겨울이 보낸 편지를 봄이 읽는 셈입니다. 편지는 우리가 기다리는 그 무엇입니다. 예기치 않게 오기도 하고, 몇 달을 내내 기다리기도 합니다. 일종의 희망 원리일까요. 편지를 기다리는 그 순간만큼은 또 다른 시간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이 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최근에 죽은 이의 앞으로 도착한/ 여러 통의 우편물>을 통해 환생의 암시에까지 가닿습니다. 객지를 떠도는 영혼 같은 것, 우리 몸과 마음이 주소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이제 우리는 이 봄에 배달된 벚꽃 같은 영혼이며 다행히 이 몸이 주소인 것입니다. 한 계절 이렇게 만난 우리는 또 얼마나 환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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