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파로호》/ 김영남 (199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문학과지성 시인선》 387
남해 유자를 주무르면
향기로운 시간 속으로
누가 올 것만 같다
벌써 오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 와
담벼락을 돌아갔다
그러자 그 자리
환한 전등이 내어 걸린다
깔깔깔 웃음소리 굴러 나오고
웃음에 얻어맞은 난
파란 멍이 만져진다
내 멍도 그 사람 따라
담벼락 위로 올라갔으면 좋겠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가
불빛에 익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누가 그걸 주무르고 있나
소곤거리는 소리, 흥얼흥얼하는 소리
누구세요?
들어오세요
[감상]
남해의 유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풍경이 새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윽한 유자향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사람’은 계절을 이끌고 지나가는 바람인 듯싶습니다. 유자나무에 총총 열린 그 색감, 전등도 되었다가 깔깔깔 웃음도 되었다가 소곤소곤 흥얼흥얼 소리도 됩니다. 그 애교스럽고 부산한 나무 아래서 누구인들 제안의 멍이 아프게 자리하겠습니까. 자연이 사람을 치유하듯 남해 유자를 주무르고 있는 화자의 생각과 마음이, 눈웃음 선한 얼굴과 겹쳐집니다. 마지막 두 행은 주제에 대한 시인만의 위트 있는 응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