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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 김명인

2011.03.08 15:16

윤성택 조회 수:1492 추천:131



《꽃차례》/  김명인 (1973년 『중앙일보』로 등단) / 《문학과지성 시인선》367

          모자

        구릉을 뒤덮은 샛노란 유채 꽃밭이어도
        구름이 차지하면 그늘진 방석
        누구에게나 환한 화원은 아니었다
        무너미 타 넘고 오는 어스름 속
        널 세워두고 혼자 돌아서는 저녁
        흔들리는 가지에나 걸쳐놓은 바람이
        빈터를 두른 녹슨 철조망에도 붐비고 있다
        문득 그 자리에 모자를 걸어둔 채 떠나왔다는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으스스해져 한기에 떤다
        해마다 이맘때면 화관(花冠)을 고쳐 쓰는
        대지의 습관처럼 거기 어딘가 폭죽 매단
        수만 꽃송일 엮어 민대머리에 얹는
        나비 날개로나 져 나르는 구름 모자가 있었는지
        내 몸에 돋아난 가시로
        널 찌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꺾인 가지 하나 자꾸만
        허공 속으로 뻗어가자고 한다


[감상]
어디든 볕 좋은 곳에 여행가기 좋은 3월입니다. 여행을 가게 되면 종종 모자를 쓰곤 합니다. 이렇게 이 시는 ‘모자’의 모티브를 봄의 풍경으로 세련되게 승화시킵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듯 강렬한 유채 꽃밭에서 구름 그늘이 겹치는 풍경, 빈터의 녹슨 철조망 사이를 스치는 바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너를 향한 그리움은 아니었는지. ‘널 세워두고 혼자 돌아서는 저녁’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 ‘내 몸에 돋아난 가시’로 상처를 낸 자괴감 같은 것이, 이 맘때쯤 봄의 들녘으로 아릿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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