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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이 놓여 있는 자리 - 이기인

2011.03.02 15:34

윤성택 조회 수:1164 추천:127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이기인 (2000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 《창비 시인선》316

          송곳이 놓여 있는 자리

        저녁에 동그란 상처를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 라면상자에서 꺼낸 서류철을 보며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한다
        송곳으로 뚫어서 묶어놓은 명단의 이름은 긴 밭고랑처럼 길고 순하다
        송곳 하나 후빌 땅이 없어서 마음에 구멍을 하나씩 만들고 죽은 사람들이다
        이제 이들은 죽어서 검은 표지의 송곳 구멍을 하나씩 갖게 되었다
        나는 오늘 송곳 끝에 매달린 빛을 보다 붉은 핏자국을 하나 떨어뜨렸다
        저녁 하늘에 뚫어놓은 수많은 구멍의 빛을 보다 책상 위의 핏자국을 하나 지운다
        구멍이 많은 하늘이 빛을 흘리고 있다
        

[감상]
살면서 땅 한 평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임대와 월세, 전세로 전전하면서 이 생을 마무리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송곳’은 세상에 대한 상처이자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시를 읽다보면 송곳에서 연상되는 동그란 구멍을 여러 이미지로 연결시키는 깊이 있는 흐름이 인상적입니다. 서류철에서 마지막 행 저녁놀까지 송곳이 놓여 있는 자리를 좇다보면 어느새 순한 사람들의 상처가 붉게 각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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