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십대 - 고정희

2011.02.22 11:16

윤성택 조회 수:1521 추천:125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창비 시인선》104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감상]

시는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덧 이 시가 여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문득 이곳에서도 들녘이 보입니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왔는지, 또 어떻게 나를 보내왔는지 잠시 십대와 이십대, 삼십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시인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인터넷에 검색되는 수많은 ‘고정희-사십대’의 시는 아직도 시인이 펜을 들었던 그 시각, 그 풍경에 가 있습니다. 지금 막 들녘에 도착한 사람, 이제 그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마블링 - 권오영 2020.04.23 174 0
1190 흙의 건축 1 - 이향지 2015.05.11 1659 0
1189 벚꽃 나무 주소 - 박해람 2015.05.11 3489 0
1188 절정 - 함성호 2011.04.25 3927 157
1187 벽 - 심인숙 2011.04.14 2025 139
1186 남해 유자를 주무르면 - 김영남 2011.04.06 1732 160
1185 빨간 우편함 - 김규린 2011.04.05 1974 149
1184 사랑 - 김요일 2011.04.04 2388 158
1183 행복 - 이대흠 [2] 2011.03.18 3510 182
1182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692 146
1181 버려진 - 최치언 2011.03.11 1286 130
1180 방황하는 피 - 강기원 [1] 2011.03.09 1747 127
1179 모자 - 김명인 2011.03.08 1411 131
1178 하늘 위에 떠 있는 DJ에게 - 이영주 2011.03.03 1281 137
1177 송곳이 놓여 있는 자리 - 이기인 2011.03.02 1164 127
1176 당신이라는 이유 - 김태형 2011.02.28 1825 126
» 사십대 - 고정희 2011.02.22 1521 125
1174 비닐하우스 밤기차 - 이승주 2011.02.21 1028 116
1173 사하라의 연인 - 김추인 2011.02.16 1138 140
1172 피할 수 없는 길 - 심보선 [1] 2011.02.14 1619 134